13년된 꽃무늬 미니 원피스가 제철이라

올해도 입는다고?

by 윤나다




낮의 길이가 길어지는 하지가 지나고 기어코 소서가 왔다. 경악스러운 더위가 시작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한여름으로 접어들면 옷장에서 꼭 찾게 되는 원피스가 있다. 올해로 벌써 13년쯤 된 꽃무늬 미니 원피스로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에서 샀다. 숱한 브랜드와 원단이 좋아서 돈값을 한다던 옷들을 다 제치고 올해도 살아남았다. 평소에 옷을 자주 사기도 하고 2년쯤 안 입거나 싫증 난 옷은 미련없이 정리하는데 이걸 이렇게 오래 입게 될지 몰랐다. 어디 하나 해진 곳이라도 있어야 그 핑계로 버릴 텐데 멀쩡하다. 디자인이나 패턴마저도 13년 내내 촌스럽지 않았다. 물론 내 기준으로. 그래서 이맘때가 되면 제철 과일 수준으로 독보적으로 신비한 존재감을 뽐내며 내 손길을 기다리는 이 원피스를 또 입는다. 이제 무섭게 더워질 일만 남았다는 것이 실감 난다.


한때는 물건을 아껴가며 오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인생의 모든 중요한 계약을 동행한 20년 된 만년필, 꿈꾸던 곳으로 기필코 데려다준 15년 된 수제화 구두처럼 시간으로만 만들 수 있는 에피소드를 개인사에 적립하고 싶었다. 얼마나 멋진가! 저에게는 30년쯤 된 손목시계가 있어요, 라고 시작되는 근사한 이야기들 말이다. 속세의 물건에 쉽게 현혹되고 갖은 이유를 대며 쇼핑의 합리화를 멈추지 않는 내게 '아껴 쓰고 오래 쓴 물건'이란 역사가 생길만 하면 신상으로 대체되었으니 늘 공석이었다. 요즘 차고 있는 시계에 기어코 시간을 입혀 이야기하고 싶다고 25년쯤 버틴다면 가능할까? 왠지 그때는 우리도 아이언맨처럼 허공에 띄운 키보드로 글을 쓸 것 같은데 디지털 소외 계층으로 분류되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이번에 거실을 정리해야 할 일이 생겨 기회 삼아 가구 배치도 바꾸고 내내 눈에 거슬리던 물건도 치우기로 했다. 이런 힘 쓰는 일에 특화된 튼튼한 장녀가 하루 날을 잡았고 온갖 물건을 미련도 없이 버리고 기어코 원하는 방향으로 가구도 옮겼다. 그리고 대포 자루에 내 기준으로 오늘부터 같이 살 수는 없지만 버리기에는 애매한 물건과 말도 없이 버리면 왠지 엄마한테 한 소리 들을 것처럼 울고 있는 물건을 별도로 분류해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든 정리가 끝난 후 일주일이 지났다. 분명 대포 자루에 잠겨 있었던 물건들인데 하나둘 모습을 비치기 시작했다. 엄마가 부활시킨 물건들은 새롭게 자리를 찾아 늠름한 기세를 떨치고 있었다. 이걸 왜 버려, 로 시작된 엄마의 분류 작업을 따라 귀퉁이가 깨진 소품은 방향만 틀어 선반에 다시 놓이게 됐고 더이상 쓸모가 없던 원목 카세트테이프 보관함은 화분 받침대가 되어 거실 모서리를 차지하게 됐다. 산책 길에 집에 두면 좋겠다 싶어 샀던 소품,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을 멋지게 보관하겠다고 샀던 가구는 그렇게 다시 엄마 손을 따라 돌아왔다.


근사한 사연이 더해지지 않아도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물건들이 있다. 특별히 쓸모의 유무를 가르지 않아도 된다.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게 가장 자연스러워서 때로는 존재마저 망각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래도 막상 사라진다고 하면 오래전 첫인상이라든지 소소한 에피소드까지 단번에 끌어올리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생각처럼 쉽게 비울 수가 없다. 그래서 시간을 먹은 자들의 자리는 움푹하다. 무엇으로도 간단하게 채울 수 없는 것이다. 꽤 멋진 물건에 시간까지 입혀가며 근사한 스토리를 완성하고 싶었던 나의 허세는 귀퉁이를 숨긴 소품을 다시 마주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소멸하게 됐다.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대단한 브랜드가 달린 것도 아니면서 내 옷장을 차지하고 있는 원피스가 있지 않은가. "점포정리"가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의 매장 컨셉인 줄도 모르고 들어가 한 철 입고 버리겠다고 샀던 만 오천 원 짜리 원피스를 오늘도 입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개인사에 어떤 자국을 크게 남길 만큼의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내게도 그냥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남아서 오래 쓰게 된 물건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