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래를 듣던 우리는 어디쯤 온 걸까
메신저에 접속해 있느냐, 아니냐가 중요하던 밤들이 있었다. 메신저의 상태 표시와 대화명은 지금의 그 어떤 SNS의 프로필보다 중요한 구역을 담당했다. 누군가의 '자리 비움'을 상태 그대로 읽을 수만은 없었고 모든 색을 감춘 콩알만 한 이모티콘 뒤로 미처 자리를 비우지 못한 감정들이 어떤 밤 내내 서성이곤 했다. 일일이 모든 기억을 해체하지 않아도 분명 그 겨울 늦은 밤까지 우리 역시 메신저에 접속해 있었을 것이다. J와는 지금도 그렇듯이 밤마다 실용이 될 수 없는 대화를 많이 했다. 그냥 삶의 귀퉁이 하나쯤은 후-하고 가볍게 날려버릴 수 있는 농담, 엉뚱하고 사소한 빈말 같은 것들이 대화창을 차지하고 휘발되기를 반복했다. 그런 농담들 사이로 J는 내가 모르는 가수나 음악을 수시로 알려줬는데 취향의 빗장이 촘촘하지 않은 나는 지나치지 않고 꼭 찾아 들었다.
세밑으로 달려가던 2006년에도 우리 사이에는 별일 하나 일어나지 않아서 농담이나 하고 있었다. J는 아주 낯선 이름 하나를 대화창에 올리며 <에피톤 프로젝트> 앨범을 들어보라고 했다. <너 어디쯤에서부터 오고 있는지>, <좋았던 순간은 늘 잔인하다>, <벚꽃 지던 삼성동, 웨딩드레스>는 에피톤 프로젝트의 1229 앨범에 수록된 노래 제목들이었다. 요즘 시대의 에세이 타이틀로 나올법한 긴긴 제목들이 신선했다. 더군다나 목소리도 없이 연주만으로 구성된 게 대부분이라 오랜만에 책 읽을 때 들을만한 음악이 나왔다고 생각했다. 가사가 없는 몇몇 곡의 가사창에는 곡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짧은 글이 배치되어 있어서 곡마다 머무는 정서를 놓치지 않고 읽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에피톤 프로젝트를 알게 됐고 앞으로의 계절을 차세정과 함께 기억하게 되리라는 걸 예감했다.
그의 앨범 중에는 <선인장>이라는 노래가 있다. 총 3가지 버전이 있는데 원곡은 <유실물 보관소> 앨범에서 심규선이 불렀고 당시 타이틀보다 반응이 좋아 바로 다음 해 차세정이 한 번 더 부르게 된다. 그리고 3년쯤 뒤 인피티트 남우현과 심규선이 듀엣 버전으로 불렀다. 멜로디부터 가사까지 꼭 들어맞는 블록처럼 완성된 노래라 누가 부르든 편곡을 어떻게 달리하든 이 곡이 끌고 가는 정서를 쉽게 해칠 수는 없다. 그래서 문득 이 노래가 생각날 때 어떤 버전으로 듣게 돼도 차세정이 <선인장>에 담았던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특히 이 곡의 가사 중에는 "내 머리 위로 눈물을 떨궈"라는 부분이 있는데 당시 이 표현 하나가 밤낮도 없이 표류하던 내 감수성에 쉽게 잡히지 않는 파장을 일으켰다. 왠지 더 많은 시를 읽고 싶어졌고 새벽에 건진 문장 하나에도 마음이 자주 쏠렸다. 종일 울렁대는 기분을 들고 나도 몇 자 적어 보겠다고 수시로 백지와 마주하기도 했다. 실속 없는 일에 마음을 모조리 쏟아 버려도 되는 시절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결과가 쉽게 나오지 않는 일들이 내게 끝도 없이 매혹적으로 굴었다. 그래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김수영 시인의 전집을 품고 있거나 긴긴 글을 써내리고 싶은 마음만 가득한 채 "일단 아무거나 써버리자!" 라고 외쳤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그냥 다 써버려도 되는 시절이었다는 걸 알게 된 건 그 모든 시간이 완전히 다 끝난 후였다. 좋아하는 걸 더 좋아해도 안 망해, 불안해 말고 더 가도 돼 라는 생각이 뻗쳤을 때는 이미 나는 그 시간에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옛날에 좋아했던 노래 하나가 오래전 죽은 나를 이토록 가볍게 소환한다. 그때 나는 뭐라도 되고 싶은 마음만 부풀었지 실제로 시도하는 것마다 넘어지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말이지. 어쩐지 속수무책으로 내몰리고 인생의 어느 구간에 매몰되어 있다고 느껴질 때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버텨보는 것도 실없는 일은 아니지 싶다. 그때 나와 사심 하나 없이 마주했던 시와 숱한 문장들이 내 눈물 안고 봄에 서 있어 주었으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건만 퇴근 후 집으로 바로 가고 싶지 않아 회사도 집도 아닌 방향으로 걷고 싶은 날이 있었다. 그리고 남우현과 심규선 버전의 선인장을 들었다. 이제 "내 머리 위로 눈물을 떨궈" 구간에 나를 놓아도 마음의 형편이 괜찮은 걸 보니 나도 모르는 밤에 또 어떤 시절이 끝났나 보다.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나는 그때 그냥 눈물을 떨궜어도 됐을 텐데 왜 악착같이 돌아서서 시인의 말들 사이로 숨으려 했던 걸까. 도저히 뭔가 안 되는 날에는 등을 굽어 그냥 울면 됐는데. 하지만 사는 날에는 일이 많이 일어나기 마련이라 시도 노래도 내게 자리를 내어줄 수 없는 날에는 끝끝내 혼자 울거나 곁을 지켜주는 이들에게 기대 울어야 했다. 내가 나를 몰라서 고단하게 달래줄 수밖에 없었던 날들이 있었다. 결국 완성된 시도 꿈꾸던 나도 없이 그 시간을 몽땅 건너왔지만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나를 안고 봄에 서 있어 줄 수는 있다. 내 온전한 힘으로 내 짱짱한 마음으로. 왠지 이런 마음이 차오르는 날이면 에피톤 프로젝트의 <긴 여행의 시작> 앨범을 꼭 순서대로 들어야 하는데. J에게 전화를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