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에서 소진하는 낭비적 기쁨

내가 이거 하려고 호텔 가잖아

by 윤나다





드라마를 다 봤는데 체력도 시간도 남아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이미 날은 넘어가고 있지만 무슨 걱정인가. 테이블에 쌓아뒀던 음식들이 형태를 잃어가고 말라갔다. 속을 내려야겠다 싶으면 물을 끓이고 바에 마련된 티를 골라냈다. 주로 혼자 있을 때 터지던 작은 탄성들이 옆에 일행이 있으니 대화로 전환되어 둘만 기억할 수 있는 감상으로 남기도 했다. 누구는 호텔에 오면 더 바쁘다고 하던데 내 주변엔 다 나 같은 이들의 조합이라 사실 조식당 갈 때 말고 부지런 떨 일이 없다. 우린 방에 한 번 들어오면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데 배정된 시간을 모조리 쓰기 위해 집중한다.


같이 볼 콘텐츠를 고르는 데 크게 고심하는 편은 아니다. 꼭 이 시간에 최대 효율을 낼 수 있는 콘텐츠를 찾자고 고르고 고르는 일을 하지 않는다. 둘 다 안 본 콘텐츠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큰 불만이 없는 타입들이라 본 걸 또 보기도 했다. 로맨틱 홀리데이를 또 본다고 해서 불만인 사람? 남주가 주드로인데? 오만과 편견 또 또 본다고 해서 짜증 난다고 말할 사람? 다아시 눈빛을 잊을 수 없는데요? 톱스타 유백이를 나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고 하는데 불만 없지. 유기농 스토리에 남주가 김지석이라는데.


한 공간에서 제한된 시간을 쓰는 일에도 여러 결정이 필요하겠지만 나는 최대한 선택을 간결하게 할 수 있는 이들과 호텔을 찾곤 한다. 서로를 이미 알아서 필요 이상의 제안을 하지 않고 가만히 시간을 쓸 수 있는 사람과 함께라면 가장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며 잠시 점유한 이 공간을 온전히 기억할 수 있기에.



/ 그랜드 하얏트 서울 /


A 언니와 이태리재에서 점심을 먹고 넘어갔다. 덥지 않아서 처서 추종자들이 밤 산책까지 기분 좋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뷰가 돋보이는 호텔이라 날이 더 맑았다면 좋았겠지만, 어차피 우리는 곧 커튼을 치고 영화를 볼 것이기에 크게 아쉬운 것도 없었다.


내 추천으로 '내 아내의 모든 것'을 봤다. 이 영화는 특히 인트로가 예쁜데 민규동 감독 특유의 감각으로 표현되어 도입부부터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분명 극장에서 봤을텐데 누구랑 갔었는지 기억 하나 없고 인트로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유의사항만 지금까지 남았다. 장면마다 터지는 유머는 여전히 억지스럽거나 촌스럽지 않아서 좋다. 무엇보다 영화를 지배하는 메시지가 2시간 내내 흔들림 없이 쭉 뻗어 나간다. 속지마, 사람은 곁에 있는 걸 잘 지킬 수 있어야 해. 여러 번 보게 되는 우리나라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흔하지 않은데 이 영화는 잊고 살다가도 문득 다시 보고 싶어진다.


해피아워 시간이 가까워져서야 움직였다. 술을 못하는 우리는 더 고를 것도 없이 겨우 샴페인 한잔 받아 자리로 온다. 이마저도 다 못 마신다. 음식은 전체적으로 맛있다. 웬만해서는 우리가 음식 가지고 까다롭게 구는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음식 앞에 두고 이런저런 평가나 부정적인 얘기도 안 하는 편이다. 무엇보다 먹을만큼 먹고나면 부지런히 방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제 우리는 드라마를 볼거니까. 늦은 밤까지 또 그렇게 달린다. 새까만 밤이 깔린 도시를 내려다 보며 냉장고에 뒀던 케이크를 꺼냈다. 내 생일이었다. 내가 일년에 케이크 두번은 제대로 먹어야 한다고 했지. 여러 디자인을 보다가 홀린듯 결정한 레터링 케이크와 귀여운 곰돌이 초 하나면 완벽해진다. 맥주도 없이 와인도 없이 따뜻한 차와 케이크를 먹는 것으로 새벽 2시가 넘어갈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휴 그랜트 나오는 영화를 틀어놨던 것 같은데 크게 기억에 남지는 않았던 것 같다.


보통 아침 7시~7시 30분 사이에 조식당에 내려간다. 그 아침에 내려가 2시간을 꽉 채워 먹기도 하는데 제약이 많은 시기이니만큼 그럴 분위기도 차림도 아니었다. 체크아웃까지 남은 시간은 각자 알아서 보낸다. 나는 잠을 조금 더 자는 편이고. 대낮이 되었건만 우리에게는 지금이 하루의 시작인 것처럼 느껴진다. 왠지 하루가 더 길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남은 오후를 무엇을 하면서 보낼지 어차피 그 끝은 잠이건만 선택지를 세우며 각자 갈 길로 흩어진다.


/ 파크 하얏트 서울 /


딤딤섬을 먹던 날 오랜만에 호텔에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미 이때부터 톱스타 유백이를 보게 될 줄 나는 알고 있었다. 날이 꽤 더워서 몰 안에서 모든 일을 해결하자고 했다. 그렇다면 아웃백이지. 우리는 10년 내내 뜬금없이 투움바 파스타가 먹고 싶다고 톡을 하는데 아무리 세상 좋아져 먹을 음식 많다 해도 불현듯 떠오르는 투움바의 맛은 쉽게 떨칠 수가 없다. 아웃백은 도처에 널린 게 아니기 때문에 동선이 맞는 날 먹어주는 게 심신에 좋다. 마치 이삭 토스트처럼. 꽤 많이 먹을 것처럼 주문하지만 생각보다 빨리 배가 부르고 소화가 늦어지는 건 노화 탓이겠지. 스타벅스에서 바크콜까지 주문을 마쳤다면 몰에서 일단 할 일은 끝난 셈이다. 1번 출구에서 파크 하얏트 호텔까지 열 걸음이면 된다지만 이럴 거면 연결을 해두지. 롯데라면 이미 벌써 너무나 그리했을 텐데. 들어서자마자 향기가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스톤과 우드의 조합으로 톤을 유지하고 있으니 시류에 시달리지 않을 컨셉이다. 텍스처의 핵심은 돈이니까. 차분하고 건조한 분위기, 통창으로 거침없이 달려드는 시티뷰에 기분이 신선해져 왠지 멀리 떠나왔다는 느낌까지 든다. 뷰 감상은 이 정도로 하자고 하고 블라인드를 모두 내리고 서둘러 자리를 만든다. 톱스타 유백이 봐야 하니까. 남주한테 오래된 애인 있는 거 아니야? 알고 보니 할머니가 여주 데려다 키운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은 안 해도 되는 드라마가 얼마 만인지. 시원한 해촌 배경과 막장 없는 수수한 스토리의 조합은 또 얼마나 청량한가. 점심에 먹은 꾸덕꾸덕한 파스타의 기운을 국물로 씻어주는 게 좋겠다는 결론이 나와 가까운 중국집을 찾았다. 사실 드라마 보는 내내 짬뽕 먹고 싶다고 타령을 한 내가 있었다. 짬뽕을 먹고 내려오는 길에는 간식거리를 사기로 했다. 남들은 이 타이밍에 맥주를 살 테지만 우리는 콤부차를 골랐지. 퇴근길에 몰린 사람들 속에 섞여 걷다가 우리는 오늘 집으로 가지 않는다는 기분을 다시 한번 확인해본다. 해가 길어진 계절이라 천천히 번지는 노을 보는 맛은 더 깊어진다. 바깥쪽으로 의자를 옮겨두고 한동안 말도 없이 날이 물러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마침 J의 생일이라 내가 따로 케이크를 룸서비스로 요청해둔 상태였다. 파자마로 갈아입고 테이블도 한번 치운 상태로 받고 싶어 시간에 맞춰 준비했다. 완벽하게 이루어진 서프라이즈였고 케이크도 실물로 보니 더 근사했다. 케이크의 꽃은 '반으로 갈라 퍼먹기'니까 세팅을 해두고 스릴러 영화를 봤다. 이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조합인지. 으스스한 분위기를 유백이로 다시 정화하고 새벽에야 잠들었던 것 같다.


나는 늦어도 7시 30분에는 조식당에 내려가고 싶었는데 동행인이 무리라고 하니 합의한 게 8시였다. 난 빨리 가서 천천히 많이 먹고 싶다고. 모든 메뉴가 깔끔하고 맛있었다. 과일부터 브런치 메뉴까지 다 먹고 김치찌개 한상까지 새로 주문했으니 말 다 했지. 평일에 휴가를 냈다면 잘 놀다가도 문득 '이 시간에 원래 회사에 있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하며 웃는 건 나뿐만이 아니겠지. 노예가 어디 가겠나 싶다. 음악을 틀어 놓고 차 한잔을 더 마시겠다며 움직였다. 체크아웃을 하고 만나기로 한 N과 접선했다. 그리고 우리는 또 딤딤섬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