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츠 보느라 또 한 시간 삭제됐는데 이건 또 언제 다 읽으려나
요즘 내 침대 근처에는 3권의 책이 있다. 에세이 <명랑한 은둔자>, 소설 <설이> 그리고 e북 리더기에 있는 소설 <오만과 편견>이다. 아침에 조금 일찍 눈을 뜨는 날이면 명랑한 은둔자를 얼굴에 떨어지지 않게 들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 무거운 눈꺼풀을 일으켜 곧장 읽기 시작한다. 그러다 옆으로 고쳐 눕고 한껏 눌린 볼을 느끼며 마저 읽는다. 언젠가 나도 해봤던 그 생각, 약속 없는 휴일에 동네를 돌 때 불현듯 밀려오던 어떤 날의 후회, 아주 오래된 관계 속으로 기어코 매몰되고 말았던 감정 같은 것들이 그녀의 텍스트를 따라가다 불규칙적으로 일어난다. 어떤 문장은 남은 잠을 쉽게 지운다. 맨얼굴에 얼음이 우수수 쏟아진 것처럼 정신이 또렷해진다. 그리고 왠지 오늘 하루는 하고 싶은 일이 많을 것 같은 예감으로 비틀어진 몸을 완전히 일으킨다.
책을 추천해 달라는 요청을 종종 받는데 그럴 때 1번으로 어김없이 적는 책이 심윤경 작가의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다. 나는 이 책을 한 자리에서 다 읽고 울었었다. 그 기억만은 선명하다. 한때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을 노트 한 페이지에 줄줄이 적어두고 느낌이 가는 대로 골라 읽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상 문학상, 김수영 문학상, 젊은작가상 등 상 받은 책에 대한 동경과 부러움을 손 끝에 끈적끈적하게 묻히고 그런 책들만 부지런히 골라냈다. 그 중 특히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을 좋아했는데 새로운 소재를 마지막 장까지 매끄럽게 끌고 나아가는 '꾼'의 성실함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많았다. 그렇게 따지지 않고 일단 믿고 보는 리스트가 된 한겨레 문학상은 뭘 읽을까 고민할 때 고르는 책 중 하나가 되었다. 그때 만난 심윤경 작가를 따라 몇 권을 더 보고 또 어느 해에는 신간 소식에도 예전만큼 부지런하게 굴지 않기도 했다. 소설 <설이>를 사둔 지는 꽤 됐었다. 읽는 중에 어쩐지 이 장면이 익숙하다 싶었는데 아마도 예전에 여기까지 읽다 말았던 것 같다.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니까 당황할 것이 없다. 그대로 밀고 나아가면 된다. 그렇게 페이지를 넘긴다.
한바탕 먹고 난 저녁을 치우면 앞으로 무언가 딱 하나 정도만 할 수 있는 밤만 남는 게 대부분이다. 드라마를 볼까 스트레칭을 할까 고민하는 사이로 읽다 만 책의 재촉이 성실하게 끼어드는 것을 외면할 수 없는 날이면 나는 기분 좋게 져주는 마음으로 책을 들고 다시 식탁으로 돌아온다. 읽는다. 어느 지점을 넘어가며 눈에 익은 표지가 완벽하게 이해되는 것을 체감한다.
새벽에 깨는 일이 요즘은 줄었는데 깨자마자 느낌은 온다. 이대로 아침까지 가겠구나. 그럴 때 손을 더듬어 e북 리더기를 찾는다. 읽다만 부분을 마저 이어 가기도 하지만 업데이트 된 책 중에 새로 고르기도 한다. 소설 <오만과 편견>은 '내 언젠가 너 한번 읽으리' 리스트에 있는 수많은 책 중에 하나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6년 전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압구정에서 A와 보고 나와 밤길을 걸으며 주말에 책으로도 읽어보자 했지만 A도 책도 모두 사라진 채 영화만 여태껏 몇번을 봤던가. 사그라진 기억을 잡아 당겨 읽기 시작했다. 그 새벽에 영화를 볼 때보다 내 표정이 더 바쁘게 옮겨 다니는 걸 느끼며 진작 읽을 걸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이제는 익숙한 일이다. 진작 읽었어야 할 책, 그때 읽었다면 더 좋았을 책들이 수두룩했었으니까. 그래도 지금이라도 읽는 게 어디냐 하는 단순한 마음으로 새벽에 눈을 뜨는 날이면 손을 더듬는다.
이상하게 누구와 겨루는 일이 아닌데 남들 다 읽은 책을 나는 이제야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또는 읽다만 책들이 하다만 일들이 불쑥 일상에 튀어 올라와 오랜 숙제를 안고 산 사람으로 만들 때가 있다. 또 남들 다 할 때 했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이제야 하게 돼서 조금 힘든 일도 있다. 그럴 때 중요한 건 딱 하나다. 잔잔하게 밀려오는 그 구린 느낌을, 괜히 더 힘든 것 같은 기분을 단숨에 잘라내는 것이다. 순간에 일어나는 느낌과 기분에 내가 집착하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내가 스스로 알아차리는 순간 단숨에 잘라내는 것도 가능해진다. 알아차린 나의 시각으로 다시 보면 그럴 일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아 됐고 그냥 하는 거지, 그냥 사는 거지 하는 감각만으로 밀고 나아가면 어느새 책의 모든 페이지는 나의 왼손으로 쏠려 있게 되고 얼마간의 계절을 잡아 먹으며 그 어떤 일이든 지난 일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침대 맡에 어수선하게 펼쳐진 책들도 모두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