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도 간편결제가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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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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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작'도 터치 한번으로 찜하기를 하고 바로 구매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매일같이 다짐하는 것만으로도 안 되고 일주일이면 팽팽한 마음도 늘어지기에 십상이니까 N페이로 주문을 좀 할게. 샛별이니 로켓이니 하며 시간마저 쇼핑하는 시대인데 닳고 닳은 나의 일상을 마감시킬 새로운 시작쯤이야 출근길에 주문해서 퇴근길에 받을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러면 나는 당장 K 산부인과에서 끝까지 엄마를 고생시키며 우량아로 태어나던 날처럼 우렁차게 세상에 다시 신고하는 기분으로 생생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역시 하찮은 인간의 의지 따위는 내 돈으로 바르는 것이야! 라고 외치면서 아침에 주문해둔 그것을 신나게 언박싱 하면서 소리를 지를지도 몰라. '새롭게 시작하는 윤나다'를 펼쳐보다가 방구석에서 끝끝내 울지도 몰라.



출근길에 지하철역을 나서면서 계단이 몇 개인지 세어 본다. 이 계단을 언제까지 오르게 될까. 또 어느 날에는 한다, 안 한다를 번갈아 부르며 오르다가 마지막 계단에서 내 마음대로 "(귀찮으니까) 안 한다!"라고 작게 내뱉으며 오늘은 안 하는 날로 명명하기도 한다. 퇴근길에는 일부러 회사에서 두 정거장쯤 걸어가 지하철을 타거나 한 정거장 전에 내려서 걷는 날도 많았다. 딱히 속 시끄러운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냥 다 저물지 않은 이 계절이 아까워서, 요만큼 남은 하루 끝일지라도 날 밝을 때 자유롭게 걷는 나를 보고 싶은 마음으로 보너스를 주듯이 걸었다. 정해진 퇴근길에 홀로 서 있는 주제에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었으나 그래도 나에게 박하게 굴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으므로 자유로운 척 걷거나 디카페인 아이스 라떼를 마시는 등 쉽고 빠른 방법으로 나를 달래며 걸었다. 조금 멀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계절을 쉬지 않고 갈아타며 셀 수 없을 만큼 누적되어 갔다.



사실 나의 욕망은 출발부터 틀린 것이 맞다. 34개의 계단을 매일같이 세면서도 안 그래도 다 지친 몸을 끌고 일부러 두 정거장을 걸으면서도 무작정 쫓아간 것은 목적어가 실종된 '시작하는 마음'이었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면서 생생한 활기, 신선한 감각, 선명한 희망들로 완벽하게 무장하여 다시 달려보고 싶었으니까. 이대로 사는 모양은 어쩐지 요즘 말로 고인물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까보면 엉망인 채로 푹푹 익어버린 내 모습 어딘가를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포장지가 빳빳한 시작하는 마음을 찾아 안 해보던 운동을 하거나 낯선 모임에 합류하며 자꾸만 가늠하고 다녔다. 이것이 아닌 저것, 여기가 아닌 저기만을 찾아 파동 하는 마음이 가닿을 자리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국민연금을 120개월쯤 채우고 나면 앞으로 남은 인생에 대단한 반전도 우아한 변화도 없을 것을 예감하게 된다. 이대로 살아도 될까에서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겠지로 넘어가는 구간에서 열정, 성장, 도전, 용기 같은 단어는 매일 밤 분실물이 되고 어느 길목에서 자주 단념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다는 것은 아침 라디오에서 듣게 된 노래 하나로도 희망을 가질 수도 있는 것. 그런 날에는 그냥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삽시간에 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지경에 닿기도 한다. 쉽게 일어난 마음일수록 힘이 세지 않으니 그런 날에는 곧장 서점에 가는 것이 좋겠지. 나보다 먼저 이 마음을 쫓아 가볼 수 있는 데까지 가본 이들의 기록이 있으니까.



마이 앤트 메리의 골든 글러브를 들었던 날은 입하가 조금 지난 어느 날의 오후였고 완벽하게 잊고 있었던 노래를 듣자 머리가 쨍하게 울렸다. 정순용과 김동률의 수다를 들으며 그 야밤에 웃던 내 얼굴까지 빠르게 스쳐 갔다. 어쩌면 지금 내가 시작하고 싶은 건 그때 실패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운동, 새로운 모임에서는 절대 찾을 수 없었던 시작. 끝을 보지 못했던 일을 다시 만지작 거리며 얼음물을 들이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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