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뽑아주세요

by 버들아씨

입을 꽉 다물어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고,

벌렁거리는 콧구멍도 고개 돌려 겨우 감췄다.


그리고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라고 쓰여있기 때문에 이 투표지는 무효표가 되었습니다."


어디선가 '하아!' 하는 한숨이 살짝 들리는 듯도 했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눈으로 아이들을 훑었다. '나'라고 써버린 아이가 낙심하여 울어버릴지 모른다.

이따가 몰래 불러 토닥여줘야지.


지금 우리 반은 1학기 학급자치회 임원선거를 하는 중이다.


다행히 '나'라로 써진 무효표가 당락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우는 아이도 없다. '나'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다.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표정을 감추고 있는지 모르나 크게 실망하지는 않은 듯하여 마음이 놓인다.


어른들의 선거에서도 가지각색 이해하기 힘든 무효표가 속출하는 마당에,

2학년이 되어 난생처음 담임도장 쾅 찍힌 용지에 투표라는 것을 해보는데, 이런 실수야 당연하고 어찌 보면 되려 귀엽기까지 한 것이다.


처음 참여해 보는 임원선거라 아이들의 얼굴엔 호기심과 긴장이 가득하다.

담임인 나는 임원선거가 단순히 회장(반장), 부회장(부반장)을 뽑는 게 아니라,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체험하고 배워가는 중요한 공부임을 알렸다.

그리고 아이들을 향해,


'선거에는 지켜야 할 네 개의 원칙이 있어요.

첫 번째는 여러분 모두 투표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여러분의 표가 모두 똑같은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여러분의 투표로 임원이 선출되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밀투표,

누구를 뽑는지, 뽑기 전에도 뽑은 후에도 모두 비밀로 해야 한답니다.'


나는 특히 비밀투표에 방점을 찍어 강조했다.

아이들은 누구를 뽑을 것인지, 누구를 뽑았는지 별생각 없이 큰소리로 떠들어버리기 일쑤여서,

우르르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입에 많이 오른 친구에게 표를 덜컥 주기도 하고,

투표 후에는 또 나를 뽑지 않았으니 너랑 안 놀겠다며 사이가 틀어지는 일이 다반사로 생기기 때문이었다.


우리 반은 7명이 회장후보로 나왔다.

출마한 친구들은 저마다 표현은 다르지만 '우리 반이 행복한 반이 될 수 있도록 선생님을 도와 열심히 할 일을 하겠으며, 규칙과 예절을 잘 지키는 착한 학생이 되어 매사 솔선수범하겠다는 의지'를 먼저 한 친구말을 눈치 빠르게 따라 덧붙여가며 자신을 뽑아달라 호소하였다.

아이들은 힘차게 박수를 쳐주었다.


그리고 본격투표를 시작하기 전에 회장 후보 한 명이 이렇게 물었다.


"투표할 때 자기 이름 써도 돼요?"


"물론이죠, 출마한 친구들은 자기에게 투표해도 된답니다."


"아하, 그래도 되는 거구나"

아이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기가 자기를 뽑는다는 것이 뭔가 비양심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자기에게 당연히 투표할 수 있다니 의외라는 듯 다들 놀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우리나라 대통령들도 투표용지에 모두 다 자기 이름을 썼을 거예요' 하려다가 참았다.


이렇게 대화가 오고 간 뒤 이루어진 투표였고,

선거관리위원(출마하지 않는 친구로 선거관리위원을 임명함)이 꼬깃 접은 투표용지 한가운데 또렷이 쓰인 '나'를 발견하고 '선생님, 이게 뭐예요?' 부른 것이다.


사실 나도 오랜만에 학급임원선거를 지도해 본다.

근 10년 만이다.

2017년부터 학급임원이 없는 1학년 담임을 해왔고, 다른 학년을 맡았을 때는 코로나펜데믹기간이어서 임원선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금 학교에서도 계속 1학년만 맡았기에 학기 초마다 들썩거리는 학생자치회선거는 딴 나라 이야기 같았다.


'나'라고 적힌 무효표가 나름 산교육이었는지 이어 치러진 남녀부회장 선거는 더 차분하고 익숙해진 분위기 속에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당선된 회장 1명, 남녀 부회장 2명이 소감을 말하자 우리들은 한마음이 되어 축하의 박수를 치며 이 시간을 마무리하였다.


그런데,


점심급식을 마친 하늘이가 쭈뼛쭈뼛 다가와 고민이 있는 듯 털어놓았다.


"선생님, 초록이가요...."


"응?"


"자기 안 뽑아줬다고 절교한대요..."


"저런! 속상하겠구나. 그런데 누구 뽑았는지 친구들에게 말했던 거니? 그것을 또 초록이가 들은 거고?"


"네..."


"하늘아, 있잖아! 이런 일이 생기기 때문에 비밀투표 해야 한다 말했던 거란다."



아이들도 첫 선거,

나도 10년 만의 선거,

엉뚱발랄 오순도순 봄의 새싹 같은 2학년 첫 임원선거가 이렇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