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로버트 레드포드를 추모하며
지난 9월, 거의 반세기이상 할리우드의 아이콘으로 군림했던 배우이자 감독, 열렬한 환경운동가이면서 정치적인 발언도 아끼지 않았던 로버트 레드포드가 세상을 떠났다.
80대의 고령의 나이지만 캡틴 아메리카, 엔드게임 등 마블 영화에서도 건장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그였기에 더욱이 이별의 충격이 컸다.
1936년 8월 18일 캘리포니아의 산타모니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 소아마비를 겪으며 다소 외로운 학창 시절을 보낸 그는 미국에 적응하지 못하고 유럽에서 예술을 공부했다. 이후 뉴욕으로 돌아와 아메리칸 아카데미 드라마틱 아츠에서 연기를 배우고, 브로드웨이의 연극으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1960년 티브이시리즈 '공원에서 맨발로(Barefoot in the park)'에 주연으로 등장하면서 인지도를 쌓아 올렸으며, 1969년 개봉한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를 통해 폴뉴먼과 함께 일약 스타덤에 올라 시대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하였다.
당시 마초적이고 터프한 할리우드 남자 배우 가운데 부드럽고 지적인 외모로 새로운 남자 캐릭터의 지평을 열었다. 레드포드 이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브래드 피트 등 금발의 파란 눈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남자 배우의 시그니처가 되었다.
특히 브래드 피트는 레드포드와 부자지간이 아니냐는 말이 돌 정도로 비슷한 외모를 가졌다. 두 배우는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 1992)에서는 감독과 배우로, 영화 '스파이 게임(Spy Game, 2001)'에서는 극 중 사제지간으로 함께 출연한다.
내일을 향해 쏴라 이후 그는 스팅(The Sting, 1973),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sby, 1974) 등의 굵직한 영화의 주연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1980년 연출 데뷔작인 보통사람들(Ordinary People)로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을 거머쥐며 일찍이 감독으로도 성공하였다. 지금이야 연출을 겸하는 배우들이나 연기를 겸하는 감독들이 많은 시대이지만 당시만 해도 굉장히 파격적인 행보였기에 많은 이들이 로버트 레드포드의 감독 도전을 걱정했지만 그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배우로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 1985), 업클로즈 앤 퍼스널(Up Close & Personal, 1996) 등으로, 감독으로는 퀴즈쇼(Quiz Show, 1994), 호스 위스퍼러(The Horse Whisperer, 1998)로 큰 인기를 얻었으며, 2002년 아카데미 공로상을 수여받았다.
그가 영화에서 보여준 캐릭터는 항상 점잖고, 지적이며 우아한 가운데 신념이나 의리, 사랑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선한 역이었다.(캡틴 아메리카에서만 빼고) 실생활도 그에 못지않은 만큼 언제나 깔끔하고 정갈한 모습이었던 그는 사생활이 노출되는 것을 극도록 꺼려 그 흔한 파파라치컷 몇 장 남아있지 않다. 또한 한창 주가를 올릴 때에도 그의 외모를 이용한 광고나 노출이 들어간 화보나 영화 등의 촬영에 임하지 않고 오로지 스크린을 통해 팬들을 만났으며, 후배 배우 및 감독을 양성하고, 영화계의 발전에 여러모로 이바지하는 삶을 살았다.
그가 이룬 업적 중 가장 큰 것은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큰 독립영화제가 된 선댄스 영화제이다.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의 캐릭터명을 가져와 만든 선댄스 영화제는 쿠엔틴 타란티노, 스티븐 소더버그, 코엔 형제, 라이언 쿠글러, 데이비드 셔젤, 웨스 앤더슨, 아리 에스터 등 수많은 스타 감독을 배출해 냈다. 2013년에는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이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으며, 봉준호 감독이 심사위원으로 위촉되는 등 한국 영화계와도 인연이 깊다.
국제적인 환경운동과 사회운동에도 적극적이었던 그는 2010년 프랑스에서 영화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2012년 제주도 강정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장문의 글을 블로그에 올리기도 했다. 또한 민주당의 오랜 지지자로 바이든을 공개지지 하는 등 정치적인 발언이나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그가 떠났다. 89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잠들듯. 그가 이루어 놓은 선댄스영화제가 개최되는 유타의 어느 리조트에서 조용히 영면에 들었다.
그가 등장한 거의 모든 영화에서 그는 언제나 자유롭고 실용적이며 개척정신 가득한 아메리칸 클래식 그 자체로 존재하였다. 이른바 '꾸안꾸'의 시조 격인 '에포트리스 쿨'한 패션의 대명사인 그는 데뷔작인 '내일을 향해 쏴라'에서는 당시에도 클래식한 카우보이룩을 현대적인 감각을 덧대어 표현하며, 다시금 자유분방하고 진취적인 멋이 있는 '아메리칸 스타일'의 패션을 유행시켰으며, 1974년작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재즈시대에 걸맞은 복식을 제대로 복각한 랄프 로렌의 의상들을 입고 나와 화제가 되었다.
영화 '콘돌(Three Days of the Condor, 1975)'과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All the President's Men, 1976)'에서는 1970년대 감성이 물씬 풍기는 코듀로이, 청바지, 샴브레이 셔츠 등 실용적이면서 클래식한 인텔리전트 캐주얼을 보여주며, 영화 속에 나온 아이템들을 대거 유행시켰다.
항상 영화 속에서 젠틀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그는 포멀 한 슈트 등의 룩을 많이 보여 주었지만 실제 로버트 레드포드는 새 옷보다 경년변화가 있는 오래된 옷이나 오래된 듯 한 아이템을 자주 착용하였다고 한다. 그에게 오래된 것은 낡은 것이 아니라, 성숙한 것이 되었다. 이는 '러기지 아메리카나룩'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기억하는 많은 팬들에게 또 하나의 유산으로 남았다.
특히 요즘 유행하는 '청청패션'이 있기도 전에 이미 '더블데님룩'을 완성시킨 장본인이기도 한 로버트 레드포드의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패션 철학은 그의 영화 속에서 영원히 빛날 것이다. R.I.P.
P.S. 그의 2018년작이자 은퇴선언작이었던 영화 '미스터 스마일(The Old Man and The Gun)은 마치 그의 인생과 그의 인생의 팔 할을 채우는 그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오마주 하는 느낌이 강한 영화이다. 꼭 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