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션을 입다.

#15 크루엘라(Cruella, 2021)

by john C

패션은 여전히 피상적이고, 정치적이다.

개인의 취향과 기호를 나타냄과 동시에 시대정신이나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는 아이템이 될 수도 있다. 시대에 따라서 프로파간다의 도구로, 저항의 메시지로도 얼마든지 변주는 가능했다.


영화 크루엘라의 한국판 포스터


영화 크루엘라는 1961년 개봉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101마리의 달마시안(101 Dalmatians)>의 빌런 클루엘라 드 빌(이하 크루엘라)을 주인공으로 각색한 스핀오프 작품이다. 원작인 <101마리의 달마시안>은 1996년 동명의 실사영화로 리메이크된 적도 있긴 하다.


1961년 개봉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101마리의 달마시안>속 '크루엘라'


홀어머니 밑에서 천방지축으로 자란 어린 에스텔라는 다니던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런던으로 이사하게 된다. 에스텔라를 키우기 위해 이사 도중 남작부인(엠마톰슨 분)에게 돈을 융통하려던 엄마는 에스텔라의 실수로 인해 남작부인의 달마시안들이 절벽으로 밀어 죽임을 당한다.


어찌어찌 런던에 도착한 에스텔라는 엄마와 같이 가고자 했던 리젠트공원에서 슬픔과 굶주림에 아파하고 있을 때 동네 좀도둑인 재스퍼와 호레이스를 만나 같이 도둑질로 삶을 연명하며 살아간다.


에스텔라는 반백의 머리를 가발로 위장(?)하고 버티며 살아간다.


재스퍼의 도움으로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백화점인 리버티에 입사한 에스텔라(엠마스톤 분)는 자신의 패션 감각을 뽐내고 싶지만 정작 화장실 청소 등의 허드렛일만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지배인의 집무실을 청소하다 위스키를 훔쳐 마시고는 백화점의 쇼윈도에 들어가 자신의 감각을 유감없이 뽐낸다.


이튿날 기존과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꾸며진 쇼윈도를 봅 지배인은 에스텔라를 해고하려 하지만, 우연히 이를 본 하이패션계의 대모이자 리버티 백화점의 슈퍼 '을'인 '하우스 오브 바로네스'의 남작부인은 에스텔라를 디자이너로 스카우트한다.


정치적인 화장과 오버스런 실루엣 등 전형적인 펑크룩을 보여주는 크루엘라의 의상


출중한 디자인 솜씨를 인정을 받아갈 무렵, 에스텔라는 엄마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고, 남작부인이 자신의 친엄마라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 남작부인에 대한 증오로 인해 에스텔라가 아닌 '크루엘라'로 흑화 한 에스텔라는 남작부인의 패션쇼나 쇼케이스, 파티 등에 갑자기 나타나 깽판(?)을 치게 되고 언론과 여론의 중심에 서게 된다. 남작부인은 크루엘라가 에스텔라임을 알아차리고 그녀를 죽이려 한다.


엠마 톰슨이 연기한 남작부인은 디올이나 샤넬 등 기성 패션의 의상을 주로 선보인다.


12세 이상 관람가로 되어있지만 줄거리는 그리 녹록지 않다. 살인이나 절도 등 범죄의 장면들과 순수한 감성만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대사나 행동들이 다수 등장한다. 하지만 더욱 큰 이유는 아무래도 이 영화가 보여주는 패션일 것이다.


70년대 펑크가 들어서기 이 전에 영국은 비틀스의 전성시대로 그들을 따라 하는 모드족들이 패션의 큰 흐름이었다.


영화의 시공간적 배경은 1970년대의 영국 런던이다. 이 시기 런던은 이른바 '영국병'이라 불릴 만큼 극심한 경제침체기였다. 냉전의 심화, 끊임없는 중동지역의 전쟁, 석유 파동 등 글로벌한 악재와 정부의 비효율적인 산업 국유화, 방만한 복지정책으로 인해 청년실업률이 100%에 달할 정도였다. 급기야 1976년에는 우리가 익히아는 IMF의 구제금융까지 받았을 정도이다. 외부적인 요인보다는 영국정부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보수당도 노동당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찢어진 청바지, 과장된 화장, 체인, 징 등 스스로 쓰레기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무시하고 괴팍한 펑크룩은 당시 젊은이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반항이자 저항이었다.


길거리에 부랑자의 수는 늘어났고 하릴없는 젊은이들은 술과 마약, 그리고 음악만이 탈출구였다. 그들이 심취했던 음악은 미국에서 건너온 '펑크'라는 록장르였다. '쓸모없는 것' 즉, '쓰레기'라는 뜻의 펑크는 할 일 없는 영국의 젊은이들을 대변하는 저항 언어가 되었으며 그들의 유일한 해방구가 되었다.


남자친구인 말콤 맥라렌과 장차 영국의 펑크의 여왕이 될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젊은 시절


당시 초등학교 교사였던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교사 생활을 때려치우고 남자친구인 말콤 맥라렌과 함께 런던의 패션거리인 킹스로드에 빈티지 소품이나 리폼한 옷 등 을 파는 '렛잇락(Let It Rock)' 잡화점을 오픈한다. 시대정신과 맞아떨어지는 반사회적이며, 해체주의적이고 관능적인 패션을 선보인 비비안과 말콤의 매장은 펑크록에 심취한 뮤지션들을 중심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으며, 그들은 이름을 아예 '섹스(Sex)'로 변경하고 그 들이 잘하는 성적인 상징이 가득하며 저항의 식이 듬뿍 담긴 패션으로 점점 변해갔다. 급기야 포르노에 나올 법한 본디지 패션이나 나치의 하켄크로이츠 문양을 넣은 옷 등 전위적이며 전복적인 패션을 선보였다.


그들이 운영했던 매장 '섹스'의 전경


한편 음악 비즈니스에도 일가견 있던 말콤 맥라렌은 ‘섹스’의 단골손님과 매장 직원을 의기투합시켜 록그룹을 만들었다. 매장의 마케팅 차원으로도 활용하려던 말콤은 그룹 이름을 '섹스 피스톨즈'라고 명명하였고, 단조로운 구성에 무형식이 가져오는 일종의 자유감이 드는 그들의 노래는 삽시간에 영국 전역에 울러 퍼졌다.


저항적인 가사와 반항적인 이미지로 펑크의 아이콘이 된 섹스 피스톨즈는 말콤 맥라렌이 제작하고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의상을 담당하였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말콤과 결별한 이 후로 그동안 갈고닦았던 저항적인 펑크룩을 하이패션에 접목시키고자 했고 결국 그녀의 이름을 딴 브랜드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만들어졌다. 바야흐로 영국의 하위문화였던 펑크가 대중적인 지지를 받는 패션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 후 수많은 영화를 비롯한 문화 콘텐츠에서 그녀의 펑크 패션을 따라 했으며, 사이버펑크나 스팀펑크처럼 세부적인 장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영국의 전통적인 패션 요소들을 이용해 위트를 더한 반항의 이미지를 구축한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컬렉션 중에서.


그녀가 구축한 펑크룩은 하이패션과 스트릿패션을 절묘하게 잇는 가교 역할을 했으며, 이후 등장하는 장폴고티에부터 마르지엘라까지 이어지는 해체주의의 패션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셰일 가스 개발을 반대하기 위해 탱크를 몰고 영국 총리를 찾아간 비비안 웨스트우드


특히 그녀가 평생을 받쳐 연구해 왔으며 자주 사용하던 타탄체크, 트위드 등의 클래식 테일러링은 현재 영국 패션을 대표하는 패션 요소가 되었다. 202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녀는 영국 정부는 물론 전 세계적인 저항 운동이나 환경 문제에 앞장섰다. 특히 2015년 그녀는 환경에 악영향을 줄 것으로 판단되는 셰일가스 개발에 반대하는 의미로 당시 영국 총리의 집 앞에 탱크를 몰고 가 큰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엠마 스톤은 이러한 패션에 걸맞은 연기와 톤 앤 매너로 자칫 산만해질 수 있는 스토리의 중심을 잘 잡아주었으나, 한편으로는 너무 보여주는 것에 급급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영화는 몇 편의 패션쇼를 내리 보는 듯한 어지러움을 불러일으킨다.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Mad Max : Fury Road, 2015)>의 의상을 담당했던 영국을 대표하는 의상 디자이너인 '제니 비반'은 이 영화를 위해 무려 277벌에 달하는 드레스를 제작하였으며, 영화에는 남작부인 역할의 엠마 톰슨이 30벌가량의 옷을, 크루엘라 역할의 엠마 스톤이 50벌 정도의 의상을 선보인다. 그녀는 이 영화를 통해 통산 3번째 아카데미 의상상을 수여받았다.


영화는 패션이나 음악에서 펑크라는 장르가 가진 저항, 전복 등의 이미지를 영리하게 차용했으나 디즈니라는 출신의 한계에 맞물러 그 시너지는 결국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복수나 개인적인 능력의 발산에 그치고 말았다.


인류의 탄생 이후로 처음 등장한 이전 세대에 대한 반항과 전통에 대한 전복의 메시지가 담긴 펑크룩은 비비안 웨스트우드를 통해 그저 젊은이들의 볼 멘 소리가 아닌 깨어있는 정신과 혁신하는 태도로 성장했다.


여전히 피상적이고 정치적인 펑크룩은 어쩌면 이 시대가 다시 요구하는 정신을 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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