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006
일신상의 이유로 하루 늦게 발행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개봉한 지 20년도 지난 영화 한 편의 후속작이 개봉한다는 이슈로 한동안 영화계는 술렁였다. 영화 팬은 물론 관계자들도 궁금해하던 캐스팅 역시 그대로 출연한다고 하니 영화계는 물론이거니와 패션계 역시 들썩이고 있다.
데이비드 프랭클 감독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원제 : The Devil Wears Prada)는 제작비의 10배에 달하는 박스오피스 수익을 올렸으며, 영화 세계관 속 패션 잡지 런웨이의 편집장 '미란다'역을 맡은 배우 메릴 스트립에게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안기고 앤 해서웨이라는 대스타를 탄생시키며 평단과 대중의 찬사와 호평을 두루 받은 작품이다. 의상을 담당한 코스튬디자이너 패트리샤 필드는 아카데미 의상상 후보에도 올랐지만 아쉽게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밀레나 카노네로가 수상하였다. 패트리샤 필드는 '섹스 앤 더시티'를 통해 뉴요커 패션의 기반을 완성하였다는 평을 받는 패션계의 대모이다.
미란다의 실제 모델이자 미국판 패션잡지 보그의 악명 높은 편집장인 '안나 윈투어'는 이 영화가 개봉하기 전까지는 심한 거부감을 보였으나, 패션업계의 현실을 상당히 디테일하게 살린 영화가 개봉 후 직접 '프라다' 의상을 입고 시사회에 참석할 정도로 애정을 보였다고 한다.
실제로 안나 윈투어의 비서일을 했던 소설가 로렌 와이즈버거가 보그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토대로 2003년에 펴낸 자전적인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영화는 많은 부분이 각색되었고, 원작보다 나은 영화로 꼽히는 몇 안 되는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 원작이 없는 2편이 대체 어떻게 나올지는 기대가 된다.(국내는 4월 말 개봉 예정)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사회초년생인 '앤드리아'(앤해서웨이 분)은 어찌어찌 입사하게 된 패션잡지 런웨이의 악명 높은 편집장 미란다(메릴스트립 분)의 비서로 일하면서 잦은 야근과 커피 심부름, 미란다의 자녀 방학 숙제까지 계속되는 허드렛일만 계속 되는 지옥 같은 회사생활을 보내게 된다. 본디 기자가 꿈인 앤드리아는 1년만 버티기로 결심하지만 회사 일은 당연히 뜻대로 되지 않는다.
패션 하면 가장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영화 중 하나인 이 영화를 오늘의 글감으로 선택하게 된 이유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발렌티노 가라바니 때문이다.
1932년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 보게라에서 태어난 발렌티노 가라바니는 파리에서 패션에 입문하여 기라로쉬에서 경험을 쌓고 로마로 돌아와 자신의 이름을 딴 발렌티노 패션하우스를 설립한다.
'발렌티노 레드 드레스'로 유명한 그의 패션은 화려함과 우아함이 공존하는 하이패션을 지향했다. 그의 시그니처가 된 '락스터드'는 고급스러움 속에 펑키함을 가미하며 대담함과 펑키함을 더해 현재도 대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2006년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레종 도뇌르 기사 작위를 받기도 하였으며, 2008년에는 그의 삶을 영화화한 <발렌티노 : 마지막 황제>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오랜 시간 발렌티노 하우스를 이끌며 화려한 인장을 남긴 그는 향년 93세의 일기로 2026년 1월 19일 이탈리아 로마의 자택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당시 저명했던 패션 디자이너 중 유일하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카메오로 출연한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안나 윈투어를 모델로 만든 영화인 것이 자명해진 만큼 자칫 출연했다가 안나 윈투어에게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분위기에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섭외가 갔음에도 다들 출연을 고사했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 흔쾌히 출연을 승낙한 디자이너가 바로 발렌티노 가라바니였다.
패션 영화의 바이블로 여겨지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는 프라다는 물론 샤넬, 에르메스, 루이뷔통, 디올 등 현제에도 하이엔드 패션을 이끌고 있는 브랜드들이 총출동한다.
런웨이라는 당대 최고의 패션 매거진의 편집장인 미란다는 샤넬, 디올, 펜디 등의 주로 블랙 앤 화이트의 정숙하고 권위적인 실루엣을 보여주는 브랜드의 의상을 입고 나오며, 사회초년생이자 미란다의 비서로 나오는 앤드리아는 점차 미우미우나 프라다의 의상으로 미란다보다는 다소 귀엽고 앙증맞은 패션으로 변신한다.
명장면을 뽑으라면 주저 없이 미란다가 패린이 시절의 앤드리아에게 날리는 '세루리안 블루'에 대한 일침이다. 일종의 무지에 대한 경고이다. 모르는 것은 죄는 아니지만 아는 것이 백번 천 번 낫다. 미란다의 일갈은 모르는 상태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알려고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실망이다. 인간이 존재한 이후 모든 동식물을 비롯한 사물이나 자연현상, 한낮 티끌에 불과한 것들까지도 그 존재의 이유는 있다. 알아야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야 판단할 수 있다. 모르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자랑도 아니다.
'발렌티노 레드'라 이름 붙인 주황색도, 빨간색도 아닌 컬러 또 한 그렇다. 모르고 보면 그냥 빨간색이지만, 패션에 대해 색채에 대해 이해가 깊을수록 그 컬러가 가진 오묘한 매력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컬러를 만든 발렌티노의 피나는 노력과 열정을 알 수 있는 법이다.
발렌티노의 의상은 영화의 후반부 파리패션위크와 박물관 자선파티에서 미란다가 입은 블랙 이브닝드레스만 나올 뿐이다. 이 오프숄더의 우아한 드레스가 패션계의 화려함 속에 감춰진 그녀의 사적인 어두움과 위태로운 상황을 극명하게 표현한 최고의 의상이었다고 생각한다. 한 마리의 블랙스완과 같은 그녀의 모습은 당당함에 가려진 가녀림이 느껴지는 의상 연출이었지 않나 싶다.
미란다의 첫 번째 비서인 에밀리(에밀리브런트 분) 이 아픈 몸을 이끌고 파리 출장을 준비하는 중에 내뱉는 대사인 '맙소사, 난 지금 발렌티노를 입고 있다고'(“I refuse to be sick. I’m wearing Valentino, for crying out loud.”)에서 한번 언급되기도 한다.
그의 죽음은 20세기 패션의 오튀쿠튀르의 마지막을 의미하며, 이는 더 이상 낭만주의적 예술성과 장인정신이 살아있는 디자이너의 소멸을 뜻한다. 패스트 패션이 패션계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된 지금의 디자이너들에겐 실용적이고 트렌디함을 요구할 뿐이다.
상기했듯이 영화는 20년 만에 후속작으로 대중을 만날 준비를 거의 마쳤다. 다시 한번 클래식의 위대함을 입증할 만한 패션영화가 탄생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