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블루 재스민(Blue Jasmine, 2013)
영화 <블루 재스민>은 2013년 개봉한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로 주인공인 케이트 블란쳇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실제 있었던 금융 사기 사건인 '버나드 메이도프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이 영화는 감독 우디 앨런이 지인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발전시킨 이야기라고 한다.
제작비 단 돈 1,800만 달러, 한화로 약 240억 원 정도의 비교적 저예산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제작비의 5배에 달하는 수익을 올렸다. 단 하나의 CG장면이나 세트 촬영 없이 오로지 배우들의 연기와 로케이션, 감독의 연출력으로 평단과 일반 대중 관객에게도 찬사를 받으며 흥행했다.
한국영화 <승리호>가 딱 제작비 240억 원으로 비슷한 규모의 제작비를 사용한 영화이지만 할리우드 환경과 한국 영화의 현실을 단순 비교하긴 힘들다. 우선 주연급 배우들의 개런티가 제작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비슷하지만 그 단위 자체가 다르다. 제일 큰 차이는 스태프들의 인건비이다. 할리우드는 기본적으로 IAPSE 등의 노조와 계약을 통해 근무시간 등의 노동 환경이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으나 한국은 여전히 프로젝트성으로 일하는 프리랜서형의 스탭이 많아 수입이 불균형하며, 4대 보험 및 근로기준도 보장되지 않는다. 한국 영화 제작 환경의 시스템의 맹점은 수직적인 감독 중심의 제작 환경이라 생각한다. 세분화되지 않고 인맥 등을 이요한 도제방식이 존재해 언뜻 보면 유연한 환경이지만 전혀 표준화되어있지 않아 시스템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시장 자체의 구조나 크기가 달라 무조건적으로 할리우드의 방식을 좇을 필요는 없지만 계속 문제가 불거지는 영화 제작 스태프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 문제는 빨리 바로 잡아야 한다.
뉴욕 상류층에서 호화로운 삶을 살던 재스민(케이트 블란쳇 분)은 남편(알렉 볼드윈 분)의 금융 사기와 자살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는다. 무일푼이 된 그녀는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여동생(셀리 홉킨스 분) 집으로 가지만, 여전히 과거의 부와 품위를 버리지 못한 채 현실과 어긋난 태도를 보인다. 점점 주변 사람들과 갈등을 빚고, 새로운 관계마저 무너지면서 재스민의 삶은 더욱 불안정해진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가 교차되며 그녀의 자기기만과 정신적 붕괴가 드러나고,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고립된 상태로 남게 된다.
사람은 현실보다 이야기를 더 믿는다.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이야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가 무너질 때, 사람은 현실이 아니라 자신을 잃는다. 영화 <블루 재스민>은 한 여자의 몰락을 그린다. 하지만 이 영화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 몰락이 돈이나 지위의 상실 때문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재스민이 진짜로 잃은 것은 ‘부유한 삶’이 아니라, 자신이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어온 서사 자체다.
그녀는 끝까지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샌프란시스코의 좁은 동생 집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뉴욕의 펜트하우스를 떠나지 못한다. 삶이 완전 망가졌을 때에도 에르메스 버킨백을 놓지 못하는 것처럼.
1837년, 프랑스 파리에서 티에리 에르메스는 귀족들의 승마 도구를 만드는 에르메스를 창립, 귀족들과 왕족들을 위해 마구를 제작하는 일만 해오다가, 자동차의 발명으로 말의 수요가 없어지자 여행용 트렁크를 만드는 사업으로 전환하면서 점차 만드는 가방의 종류를 늘려간다. 1920년 의류와 액세서리를 더한 패션 브랜드로 확장하였고 1984년 우연히 비행기를 같이 타게 된 배우 제인 버킨과 당시 에르메스의 회장이자, 에르메스 가문의 5대 자손인 장 루이 뒤마에 의해 탄생한 '버킨백'이 엄청난 유명세를 떨치며 명품 중의 명품의 반열에 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르메스가 명품이라 할 수 있는 구찌, 프라다, 루이뷔통과는 또 다른 최상위층의 명품품의 위치에 자리하게 된 이유는 철저한 가족 중심의 폐쇄적인 경영 구조 아닐까 한다. 장인 정신과 희소성이 중요한 명품 시장에서 창업자 가문이 6대째 내려오면 소유한 브랜드는 에르메스 말고는 없다. 2010년 몰래 지분을 흡수하여 에르메스를 인수하려던 LVMH의 적대적 인수 시도 역시 에르메스 가문의 가족들이 굳건히 지켜냈으며 현재도 'H51'이라는 가족법인지주회사가 전체 지분의 약 70%를 소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량의 생산을 통한 희소성을 유지하며, 몇백 년에 걸친 장인정신의 진정성을 내세울 수 있는 점이 타 명품 브랜드와 가장 차이나는 지점이라 하겠다.
영화에는 에르메스 외에도 샤넬, 펜디와 같은 명품들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샤넬은 이 영화를 위해 특별히 당시 수장이었던 칼 라거펜트가 직접 케이트 블란쳇의 재킷을 제작해 주었다고 하며, 펜디와 루이뷔통 등은 감독과 배우의 협찬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밑바닥까지 추락한 현실과 영관스러운 과거가 가져오는 인지부조화 속에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재스민의 말과 행동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지만 뭔지 모를 동질적인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만든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가슴으로는 이미 나 자신이 재스민이 된 듯. 이미 사라진 삶을 현재형으로 말하고, 존재하지 않는 관계를 미래로 계획한다. 그녀의 말은 언제나 현재와 어긋나 있으며 그 어긋남이 바로 그녀가 버티는 방식이다. 그리고 우리가 버티는 방식이다.
그래서 재스민은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연기’를 이어간다. 상류층 여성이라는 역할, 우아한 삶이라는 설정, 그리고 자신이 여전히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착각까지. 아이러니하게도, 그 연기가 완벽할수록 그녀의 붕괴는 더 선명해진다. 우리는 그녀를 보며 불편함을 느낀다. 하지만 그 불편함은 단순한 타인의 몰락을 보는 감정이 아니다. 어쩌면 그건 우리가 각자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작은 재스민을 마주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지금 현실 속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스스로 만든 이야기 속에 머물러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