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시대는 70년대에 막을 내렸지만 그 유산은 현재도 많이 남아 있고 한국의 정치 경제 논쟁에서 아직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정치의 중요한 세력들은 박정희 시대의 공과에 대한 견해의 차이를 갖고 대립하고 있으며 진보진영은 대체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고 보수진영에서는 긍정적 평가를 넘어 전설로 존재한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한국인의 정치 경제에 관한 가치관을 평가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도 같다.
하지만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은 신화처럼 포장되어 독재를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산업화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는 경우가 많고 정부주도 경제정책을 성공의 요인으로 꼽는 데는 진보와 보수가 크게 이견을 보이지 않는다.
박정희 정권 약 18년간, 급속한 공업화가 진행되어 50% 넘는 인구가 종사하던 농업 비중은 20% 정도로 감소하고 1인당 국민소득은 80불에서 약 1600불로(약 20배), 수출은 약 5천만불에서 약 150억불로(약 300배) 성장한다.
이는 당시 세계 경제 성장 속도의 2배에 가까운 것이지만 동아시아 주요 국가들(일본,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도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으며 한국은 평균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그리고 수출주도 성장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수출촉진 정책이 취해졌다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다. 1961년 군사 쿠데타 발생 전 민주당 정부에서도 비록 미국의 권고에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원화 평가 절하를 단행해 수출산업 경쟁력의 기초를 마련했고, 이후 환율 조정이 몇차례 있었지만 국내 물가상승률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박정희 정권 기간중 지속적으로 원화는 고평가되어 수출산업에 부담을 주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수출기업에 대해 저금리 수출 금융과 각종 혜택을 주었지만 전체적으로 수출에 대한 불이익을 없앤 정도로, 환율을 자유화하면 쉽게 해결될 것을 복잡하게 만든데 불과하고, 수입 제한, 외자도입 허가 등과 저리 정책금융은 공정한 경쟁을 저해하여 대기업의 성장이 불공정한 특혜의 결과라는 비판을 받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산업화의 과정에서 우리 사회가 정당성을 가진 지배 엘리트 계층을 형성하는데 실패한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은 고속도로 건설, 포항제철과 같은 인프라와 기간산업의 건설이나 중화학공업화를 박정희 대통령의 큰 성과로 꼽기도 하지만, 오히려 수도권 집중이나 경제 여건이 성숙하기 전 과잉투자가 이루어져 경제에 부담을 준 면도 있어 공과를 평가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결단과 추진력은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최선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지금에 와서 더 좋은 대안들이 가능했다고 비판하거나 마치 박정희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고속도로나 제철산업, 중화학공업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처럼 주장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특히 저이자율 정책과 저축 장려, 원화 고평가와 수출촉진 지원 등 상충된 정책의 땜질식 처방과 일부 기업에 대한 특혜성 지원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효율과 공정의 관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다만 기업에 대한 특혜도 기본적으로는 수출, 성장에 대한 기여도 등 성과에 따라 배분되도록 설계되어 정부주도라고는 하지만 시장이나 소비자의 선택에서 크게 괴리되지는 않도록 한 점은 평가받을 만하다.
한편 수출주도형 성장은 국제 경쟁력을 기초로 하므로, 한국정부 권력이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외국 소비자들에게 선택받아야 했고 비록 정부 지원과 특혜를 받았다 해도 궁극적으로는 경쟁력 있는 기업과 상품만이 살아남게 되어, 비합리적 지원정책은 지속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박정희 시대의 경제적 성과는 정부주도 경제정책의 탁월함보다는 국민적 에너지를 경제성장에 동원한 데서 찾는 것이 더 적절하다.
박정희의 친일, 좌익 경력과 쿠데타는 집권의 정당성을 경제 성장에서 찾을 수밖에 없도록 했고 그 결과 정권의 목표는 수출, 국민소득 증가와 같은 성과주의적 지표와 연결되었다.
어떤 면에서 독재는 문민들을 정치적으로 좌절시켜 돈벌이에 힘을 기울이게 했으며 대기업 경영진과 같은 새로운 경제 엘리트 계층이 등장했고 젊은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실질적 성과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새마을운동, 국산품애용, 저축장려 등 경제성장을 위한 범국민운동이 전개되었고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와 함께 국민들은 경제적 성공을 인생의 목표로 삼게 되었다. 즉, “자본주의 정신과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의 한국형 버전이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후 베이비붐과 한국 사회의 교육열, 대통령의 자녀들도 부정입학은 생각하기 어려웠던 입시와 인재 등용에서의 비교적 공정한 경쟁은 양질의 인적자본을 형성해 70년대 이후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60년대에는 서울대 화학공학과가 70년대 중반에는 서울대 전자공학과과 이과의 최고 인기학과가 되었고, 문과에서는 정치외교학과나 법학과를 대신해 경제학과, 경영학과가 가장 인기있는 학과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열악한 근로조건으로 전태일 열사의 분신까지 가져온 어둡고 슬픈 역사도 있지만 한국 봉제산업의 터전 동대문에서는 기능인력을 키우는 양재학원 간판과 광고를 쉽게 볼 수 있었고, 1977년부터 기능올림픽 9연패를 달성한 기능공과 현장 기술자를 양성하는 기술계 학교, 실용적인 상업고도 당시 대학 진학이 어려운 청소년들에게 매력적인 교육기관으로 인기가 있었으며 훗날 우리 산업과 경제를 이끈 엘리트들이 키워졌다.
정책의 성과는 논란이 있지만 박정희 시대의 키워드는 경제성장 수출증대였고, 범국민적 운동으로 전개되어 국민적 열망으로 자리잡았다. 역설적으로 빈곤과, 좌절이 경제성장의 에너지로 모아졌고 집권기간(1961-1979) 늘어난 소득과 경제적 욕망은 한국 사회에 대중 소비자계층을 탄생시키며 80,90년대 경제도약의 중요한 기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