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 전두환 정권
시장소비자 지향 경제성과의 재평가
정부주도에서 시장중심으로, 근검절약이 미덕에서 소비를 즐기는 사회로
1960~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정부주도 경제정책은 70년대 초반부터 문제점을 노출해 1972년의 8.3 긴급명령을 통해 사채 동결 조치를 취하기도 했고 70년대 발생한 두차례의 석유파동으로 외채위기까지 겹치면서 70년대 말에는 ‘경제안정화 시책’이라는 이름으로 경제정책의 방향전환을 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79년 한 해는 소위 안정론자와 성장론자 간의 대립으로 정책은 일관성을 잃고 표류할 수 밖에 없었다. 정책 전환은 박정희 대통령의 피살이라는 돌발적인 사태(1979. 10.26)로 인해 급진전 되었으며 안정론의 기수격이던 신현확씨가 권력 실세로 등장하면서 1980년 1월 21일 환율, 금리, 유가를 대폭 인상하는 조치를 시행했다.
1달러당 환율이 485:1에서 580:1로, 은행대출금리는 연 18%에서 연 24.5%로, 유가는 50%가 넘는 폭으로 일거에 인상되었다. 그 충격은 실로 큰 것이었다. 당시의 외채 중 상업차관 잔고가 약 60억 달러이고 예금은행의 대출금 잔고가 약 9조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동 조치에 의한 기업의 추가부담은 어림잡아 1조원이 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21 조치는 한국경제의 성장메카니즘을 질적으로 변화시켰다. 이제까지 재벌을 만들어내는 요술방망이였던 저 환율 외자도입, 저 금리 은행대출은 더 이상 신통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또한 1970년대의 가장 중요한 정치 자금원들을 고갈시킴으로써 정치적으로도 엄청난 변화를 초래하였지만, 이러한 정책적 흐름은 전두환 신군부 집권기(1980년5월-1988년3월)인 제5공화국 정부(5공)에서 계속 유지되었다.
그런데 어떤 힘이 이러한 충격적 조치의 실현을 가능케 한 것일까?
첫째로, 특권으로 소외되어 있던 일부관료 예컨대, 기획 분야의 관료들은 그러한 제도적 비리로부터 자유로웠으며 도리어 경제구조 재편을 통해 부상하고자 하였고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의 권력 공백기를 이용해 이들은 신속하게 자신들의 생각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둘째로, 1970년대를 통해 충분히 힘을 얻은 재벌들은 더 이상 자신의 운명을 정부에 맡기는 것은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이제 시장에서 정당한(?) 경쟁을 하는 것이 도리어 유리하다는 자신이 생겼다. 또한 수출량이 늘어감에 따라 환율왜곡으로 인한 손실이 커졌으며 국내시장에 한계를 느껴 비록 외채부담은 늘더라도 환율을 적정 수준까지 인상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업계에서도 일어 났다.
셋째로, 왜곡된 경제구조로부터 파생되는 제문제들을 더 이상 정부가 관리하는 것이 곤란하다는 인식이 일반화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1980년의 1.21조치를 이토록 높이 평가하는 것에 대해 어떤 사람은 그해에 경제개발계획 수립 이후 최초로 경제성장은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물가는 폭등하는 등 한국경제가 최악의 퍼포먼스를 보였던 해였음을 지적하며 반박하려 들지 모른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과 70년대말 유가 급등(2년간 약 3배로 폭등)으로 빚어진 2차 오일쇼크 그리고 경제체질 변화에 기업들이 신속하게 적응하지 못한 점 등을 고려한다면 1980년 한국경제의 퍼포먼스의 저하를 1.21조치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보통사람들은 5공(전두환 정부)의 경제 철학이나 정책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 보다는 5공 통치기간중 일어났던 경제비리들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한다. 장영자사건, 명성사건, 새마을비리, 국제그룹 도산, 부실기업 인수관련 비리, 일해재단 건 등으로 이어지는 개별적인 사건 그것도 전두환씨의 친인척 비리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비리들이 다발해야 했던 원인은 1980년대에 들어서 정부가 제도적으로 특혜를 줄 수단이 줄어들자 측근들의 축재는 개별적 비리의 형태로 바뀌었고, 정치자금을 모으는 데 회유보다는 협박을 사용한 경우가 많았으므로 그만큼 저항도 컸던 것이다. 1988년 국회 5공특위( 정식 명칭은 ‘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권력형 비리조사 특별위원회)의 청문회에서 “할 수 없이 그저 편하게 살기 위해 정치자금을 낸 것“이라는 증언은 그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우리가 5공의 경제정책에 대하여 평가해야 할 부분은 통치기간 전반에 걸쳐 출범기의 정책기조에 따라 환율과 은행금리가 되도록 시장에서 자유롭게 결정되도록 함으로써 이를 통해 부당한 이득을 얻는 일을 차단하고 시장의 자원배분 기능을 극대화하여 경제 효율성을 높이려는 의지를 충실하게 유지하고자 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책적 노력에 의해 기업은 무턱대고 외채나 은행 빚에 의존하는 체질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으며 외자도입인가를 얻기 위해서 혹은 은행 빚을 얻기 위해서 줄을 서는 일에 들이던 노력을 생산성 향상에 돌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변동환율제가 시행되면서 1970년대말의 환율은 484:1에서 890:1(1985년)까지 상승했고(국제수지 흑자로 1987년에는 792:1로 하락) 1986년부터 국제수지가 흑자로 전환되어 1988년에는 무역수지 흑자가 1백억달러를 넘어섰다.
은행 대출 금리는 1979년 연 19%에서 25%(1980년)까지 상승하였다가 단계적으로 하락하여 10%(1982년)로 되었고, 1984년부터는 10%~11.5%사이에서 움직였는데
5공 집권기간 중 물가는 매우 안정되었으므로 실세금리(시장에서 자금의 수급에 의해 경정되는 금리)를 반영한 것이다. 물가가 부동산 가격의 안정으로 은행 대출은 더 이상 특혜가 될 수 없었다.
또한 5공 집권기간중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고 한차례 개정(1987년의 개정에서는 대규모 기업집단에 대한 출자총액제한 규정 도입)되었는데 경제민주화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경쟁을 제한하고 재벌 길들이기 수단으로 활용될 여지가 있음은 아쉬운 일이다.
어찌보면 5공 집권기간중 경제정책의 실패는 경제가 아닌 교육분야에서 있었는데 이에 대한 인식은 매우 부족한편이다. 1981년 정부는 대학교 입학 정원을 18만 7천명으로 1980년보다 60.3%나 늘렸으며 1983년에는 20만3천명 으로까지 증가하였다. 이 조치는 1960년대 이후 집권자들의 골칫거리였던 학원 소요문제를 해결할 생각으로 대학 입학정원은 늘리고 졸업정원은 그대로 두어 학생들이 데모보다는 공부에 전념케 하려는 것이었다고 하는데, 결국 졸업정원까지 늘어 의도와는 달리 민주화 운동을 소수 지식인 뿐 아니라 대중이 참여하는 운동으로 확신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대학정원의 급격한 확대는 경제분야에도 의도하지 않았던 충격을 가져왔다. 기능 인력 수준과 공급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하여 기능인력 부족, 고학력 실업으로 대표되는 노동시장 인력수급 문제는 1980년대 후반부터 국제경쟁력을 약화시킨 요인으로 지적되기도 했지만 산업구조 변화에 조기대응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어쨌든 5공 정부 출범기에 현실을 모른다는 말을 듣던 기획분야 관료들이 입안한 정책을 비교적 충실하게 유지하면서 1980년대 초의 급격한 외채 누증(총 외채 150억불 당시 GDP의 1/4 수준)과 물가폭등(1979~81년간 98.5%)이라는 심각한 상황에서 역대 어느 정권보다 높은 연 평균 9.3% 경제성장과 2~3%의 물가안정이라는 경이적인 성과를 남길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경제성장은 전후 베이비붐 세대가 경제활동인구로 성장하면서 나타난 결과이기도 하다)
전두환 대통령 자신이 정책전환이 가져올 엄청난 변화를 충분히 인식했는지 모르지만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가 있었기에 기업들에게 특혜를 나눠줄 권력을 없애는 새로운 경제정책을 지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물가를 안정시킨 일은 내세우면서 그러한 성과를 가져온 경제구조 전환의 업적은 강조하지 않는 것이 의아하지만 5공 집권기간 중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경제교육 내용이 정부 정책 홍보보다 국민들에게 시장경제를 이해시키는 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5공을 비리가 많았던 정권으로 기억하지만, 과거처럼 금리나 환율 등 경제구조 전체를 왜곡시킴으로써 얻어지는 잉여를 기업인과 정치가가 서로 고객의 관계에서 나누어 갖는 형태라기 보다는 부실기업정리나 일해재단모금, 기타 친인척의 비리와 같이 개별 사건에서 뇌물을 받거나 협박을 통해 수금하는 형태를 취했으므로 국민경제의 초과부담은 도리어 적었고 경제의 거시적 운용은 상대적으로 정치권으로부터 독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역설적인 것이지만 정치자금 동원 과정에서 나타난 물의나 친인척 치부과정의 비리는 박정희시대의 구조화된 부패보다 보통사람들의 피부에 와 닿았고 국민들로 하여금 부정한 권력에 대해 분노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민주화를 앞당기는데도 공헌하였다. 과거와 같은 경제운용 왜곡에 의한 제도적인 부의 축적이나 정치자금 동원은 어려워지고 이제 형사벌 대상이 되는 개별 사건 비리의 형태가 되면서 검찰이 갖는 힘이 강화되었고 독재권력에 의한 통제가 어려워지는 순간 검찰왕국의 등장은 예견 된 것이다.
필자가 박정희시대의 최대의 공헌으로 "잘살아보세"를 외치며 국민적 에너지를 경제 성장에 동원하고, 그 결과로 기본적 먹을거리 문제를 해결한 대중 소비자계층을 탄생시킨 점을 꼽았는데, 박정희 시대는 여전히 근검 절약을 미덕으로 하는 태도에서는 벗어나지 못해 컬러TV도 제품은 생산해도 사치 소비 풍조를 막아야 한다는 이유로 방송은 되지 않았으며 1970년대 후반 유신체제가 대중문화에 대한 억압을 강화하면서 청년들의 문화적 소비생활은 위축되었다.
5공 정권은 1980.12 컬러TV 방송을 허용했고 그 결과로 나타난 생산파급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그리고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정설처럼 굳어진 5공 시대의 3S(Screen, Sports, Sex)를 통한 우민화 정책 내지 청년들의 관심을 정치적인 것에서 대중문화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정책은 결과적으로 오늘날 한류 문화 탄생의 밑거름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스포츠 외교 강화로 얻어진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는 메달집계 순위라는 4위라는 기록적인 성과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을 세계가 주목하도록 만들고 대학 입학정원 확대와 맞물려 민주화를 향한 시민들의 외침은 군부를 완전 장악한 독재권력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사태로 발전했고, 그 주체가 누군인지는 아직도 논란이 있지만 6.29 선언으로 헌법개정과 함께 선거에 의해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는 나라가 되었다.
또한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지만 1가구 1전화를 비롯하여 한국이 IT강국으로 도약하는 인터넷 통신의 기반은 이 시기에 마련되었고 추진의 주역은 전두환 정권이 발탁한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오명장관이었다.
요컨데 5공 정권은 비인도적 폭력으로 민주화 열망을 좌절시키며 집권한 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같은 어둡고 슬픈 기억을 남겼지만 종래의 정부주도에서 시장중심 경제 운용으로 전환해 구조화된 비리를 차단하고 수입자유화의 진전과 함께 소비자들은 보다 폭넓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근검과 절약이 미덕인 사회에서 소비를 즐기는 사회로의 첫걸음을 내딛게 만들었다. 또한 1가구1전화 보급이 목표이던 시대에서 훗날 인터넷 시대 도래에 대비한 통신기반을 구축하며 경제성장에 있어서도 최고의 성과를 거둔 것 또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