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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구 Jan 07. 2022

한국 자본주의 시장경제형성과
이승만 대통령

 필자에게 이승만 정권 시기는 초등학교도 입학 전이니 그저 일상생활에서의 경험 정도만이 기억에 남아 있다. 박정희 시대에 경제학을 전공했고 경제부처 전두환 정권에서 공무원을 시작해 박정희 시대까지는 제도적 유산들은 직접 경험하고 집행하거나 개선하기도 했지만, 이승만 정권 시기에 대한 필자의 글들은 전적으로 다른 학자들의 연구들을 필자의 관점에서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하다.

      

 이승만 대통령 시기 경제정책을 오로지 경제적 측면에서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어떤 면에서 1948년 헌법만으로는 한국을 자본주의 국가라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당시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고 헌법 기초에 참여한 인사들도 시장경제나 자본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도 정부수립 직후 최대 경제정책은 1949년의 토지개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토지개혁이 산업화를 이끌 자본가 계층을 붕괴시켰다는 비판도 있지만, 자영농 계층을 확대해 이미 토지개혁을 단행한 북한에 맞서 6.25 전쟁 기간 남한 정부가 민중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게 함으로써 국가를 지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단순히 경제정책의 관점에서 평가할 것이 아니다. 토지개혁은 이승만 정권만이 아니라 미군정의 요구사항이기도 했고, 이승만은 지주계급인 한민당의 지지를 업고 대통령이 되기는 했지만 오히려 정적에 속하는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임명해 토지개혁을 추진하는 정치적 수완도 보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초기 관심은 경제정책보다도 열악한 국내 정치적 기반 위에서 미국과 외교적 거래로 권력을 공고히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승만 대통령이 전혀 경제문제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 1949년에 기획처를 만들고 ‘산업부흥5개년계획’도 수립했지만 곧바로 6.25가 발발했고, 전쟁수행이라는 초유의 위기 상황에서 경제정책은 중요한 관심사가 될 수 없었다. 다만 전후 2년쯤 지난 1955년 시점에서 전전 수준으로 경제가 회복되었고, 경제개발 계획을 수립해 경제성장을 시도하던 중 4.19가 터져 민주당정권이 수립되었다. 실제로 5.16 쿠데타 하루 전 국무회의 심의를 했다는 4.19로 집권한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계획도 기본적으로는 이승만 정권에서 수립된 경제개발계획에 근거하고 있는 것들이므로 이승만 정권시기에 경제정책에 손을 놓고 있었다고 보는 것은 적절한 평가는 아니다.


 아마 이승만 정권 시기에 토지개혁 다음으로 중요한 경제정책은 미군정에 귀속된 일본인이 소유했던 많은 기업과 자산들이 민간에게 불하해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작동하게 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귀속재산 불하는 헐값에 팔아 넘기는 셈이었고 많은 비리가 있었다는 점은 다수 사례들로 뒷받침되고 있지만 그 규모나 영향을 정확하게 평가한 보고서나 연구는 찾기는 쉽지 않다. 귀속재산의 마지막 불하로 볼 수 있는 은행의 민영화가 1954년에 진행되었고, 1955년 IMF와 IBRD에 가입했으며 중앙은행 중심의 미국식 은행제도가 구축되었다.(차현진 중앙선테이 칼럼 중앙은행 오디세이 참조)


 이승만 정권 시기에 우리 경제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는 미국의 원조였다. 1955년부터 1960년에 이르기까지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미국 원조의 비중은 20%에 가까웠고 재정은 거의 대부분을 원조에 의존한 경우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무엇보다 원조를 많이 받아내기 위해 노력했고 상당한 성공을 했다고 보여지지만, 역설적으로 그로 인해 경제정책은 실패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즉 원조를 많이 받기 위해 폭발적인 인플레이션 상황아래서도 환율을 고정시키고, 원화로 원조의 수요를 계산한 후 저평가된 환율로 계산한 달러로 환산하는 방법(예를 들어 원화로 원조 수요를 180억원으로 산정하고, 시장환율이 360:1 정도라면 5천만 달러이지만 180:1의 공정환율로 계산해 1억달러를 요구)을 통해 원조수요의 규모를 늘려 잡았는데, 미국은 이 점이 늘 불만이었고, 또 이로 인해 기업들이 수출에 쉽게 뛰어 들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물론 박정희 시대와 비슷하게 이승만 정권기에도 수출기업에 대해 원화의 고평가(저환율)를 보상하기 위한 수출환율은 따로 정하거나 수출해서 획득한 외환으로는 직접 수입에 사용할 수 있도록하기도 하고 각종 혜택(수출보상금, 수입허가 연계 등)이 주어지긴 했지만 아직 수출역량이 부족하기도 했고 제도들이 확립되지 않아 기업들이 안정적으로 사업을 확대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기업들은 시장환율과 공정 환율의 차이를 이용해 원조 물자 수입으로 돈버는 것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고 필연적으로 정치가나 관리들과의 유착관계가 싹트게 되었다. 더구나 이런 기업들간의 국내시장에서의 경쟁은 제한될 수 밖에 없었고, 상품을 효율적으로 만드는 능력보다는 원조 물자의 할당에 의해 좌우되었다. 즉 원조는 전후 기아 선상의 한국 경제를 지탱하는 젖줄이기도 했지만 한국 경제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시기에 신속하게 전후 복구를 마무리하고, 출생률이 4%가 넘는 비경제활동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에도 불구하고 연 5%가 넘는 경제성장을 구현했고, 각종 금융, 세제, 무역 관련 제도들이 확립되었으며 경제발전에 관한 연구들도 이루어져, 60년대 이후 고속성장의 기틀이 만들어진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요컨대 이승만 정권 시기는 그동안 한국 경제의 정체기로 평가되어 왔지만 당시의 높은 출산율을 감안한다면 상당한 성장을 구현한 것은 사실이고,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가 일천한 환경에서 자본주의 제도를 확립했다는 점을 무엇보다도 높이 평가해야 한다. 만일 이승만 대통령의 확고한 신념과 리더십이 없었다면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공산주의 열강에 둘러싸인 한국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귀속재산 불하 과정에서 경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원조를 많이 받아내려는 의도라고는 하지만 환율을 비정상적으로 운용해 결과적으로 원조물자의 배당역시 특정집단에 특혜를 준 셈이어서 한국 자본주의의 출발에 커다란 오점을 남긴 것은 물론 50년대 중반 이후 경제적 도약에 발목을 잡는 결과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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