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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당하다

생애 첫

by 진명 Mar 1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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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를 넘어 4주 차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아침마다 만나는 내 키보다 높이 쌓아져 있는 야채 박스들을 모두 소분하고 진열하는 것이 나의 업무였다. 남자라서 구황작물 등의 무거운 친구들을 주로 다루곤 했는데 매일 같이 작업하다 보니 전완근의 피로가 풀리지 않고 항상 뻐근함이 남아있었다. 7시부터 업무를 시작해 10시-11시쯤 되면 전완근이 털려버린다. 덕분에 따로 운동하지 않아 빈약했던 전완이 좋아질 참이었다.


나는 1호점에 근무하며 2호점은 바로 옆 블록에 붙어있다. 두 개의 점포에 총 5명의 소분직원이 있고 1명의 왕고 이모님이 양쪽 점포를 왔다 갔다 하며 각 점포당 2.5명의 인원배치로 물량을 쳐내는 구조다. 양 점포를 오가며 일하는 왕고 이모님은 며칠 전부터 2호점에 신규직원이 들어와 교육을 시켜가며 함께 일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래서 요 며칠간 왕고 이모님은 1호점에 머무는 시간이 매우 짧았고 1호점에는 2명, 2호점에는 3명 꼴로 근무하게 되는 셈이었다. 매장에는 아침 일찍부터 손님들이 들이닥치니 최대한 빠르게 기본 진열물량을 맞추고 물건이 빠지는 상황에 따라 신속하게 소분하고 리필해내야 하기 때문에 소분 작업에는 어느 정도 이상의 속도가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최근 상대적으로 적은 인원이 업무를 하며 몸의 피로도가 누적되어 왔다. 건장한 남자인 나도 오전 11시쯤부터는 마지막 체력을 짜내야 하다 보니 업무강도가 더욱 높아진 최근,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본업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점심을 차려 먹고 책상 앞에 앉으면 깜빡 조는 때가 많았다. 정해진 퇴근시간은 오후 1시이지만 물건을 모두 소분해 내면 업무가 종료되는 속칭 야리끼리 스타일의 업무(야리끼리: 오늘 마무리할 작업량을 정해 두고 일을 끝마치면 정해진 퇴근 시간 전에 퇴근 가능을 뜻하는 건설현장 용어)를 감안하면 11,000~12,000원 정도 되는 시급인 셈인데 최저 시급 근처 업무에 주 6일 동안 매일의 업무강도가 애초부터 꽤 높고 최근 2명의 인원으로 처리하다 보니 피로도가 상당했다.


그렇다고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하루 이틀 만에 그만두는 사람이 흔할 정도로 채용공고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지만 최소한 3개월은 해보고 싶었고 함께 일하는 분들도 잘 대해 주시는 데다 시장의 아침은 무엇보다 매력적이었다. 매일 아침 어슴푸레 밝아오는 하늘을 향해 걸어가며 책을 읽는 20여분의 출근시간이 좋았고, 눈발이 날리는 광경을 바라보며 소분을 하는 것도 꽤 낭만적인 데다 8시쯤부터 가게 안으로 드리우는 햇살은 정말 아름다웠다. 딸기 두 팩에 팔천 원! 고당도 블랙라벨 오렌지 열세 개 만원에 가져가세요! 팀장님과 판매직 형님들의 우렁우렁한 목소리, 시금치 천 원! 대파 한 단에 천오백 원에 들여가시라는 캐셔누님의 종달새 같은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넘치는 에너지도 좋았다. 나는 가능한 한 오래 일하고 싶었기 때문에 업무 종료 후 사장님에게 현재 업무구조의 개선을 요청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어쩔 수 없다였다. 현재 들어오고 있는 제품 물량은 우리 소분인원에 적합하다는 사장님의 판단. 당연히 인원은 더 쓸 수 없으며, 신규 직원은 계속 케어가 필요한 상황이므로 앞으로 한 달 정도는 현재와 같은 구조로 일할 계획이라고 했다. 사장님은 나와 이야기를 나누며 대책을 고민하는 한편 감정적으로는 억누르는 눈치였다. 내 입장에서야 답답함이 가중되는 결과인터라 퇴근길에 생각이 많아졌지만 다소 껄끄러운 주제의 대화임에도 서로 담백하게 이야기 나눴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된 건 바로 그 이후였다.


퇴근길 집으로 걸어가는 중에 사장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무래도 화가 나서 안 되겠고 불평불만이 많으니 오늘까지만 근무하시라는 해고통보였다. 다소 당황했지만 돌이킬 상황도 아니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기 때문에 빠르게 수긍했다. 그리고 내가 곧 다시 가게로 갈 테니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가게에 두고 온 작업복을 가지러 가야 할 텐데 하루이틀이라도 묵히느니 급작스럽지만 동료들에게 인사도 하고 사장님과 내가 서로 오해가 있는 것 같으니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가게에 도착해 만난 사장님은 손님들도 있는 매장에서 다소 격앙된 표정으로 다시 한번 해고의사를 밝혔다. 굳이 저럴 필요가 있나 싶기도 했지만 나는 잠시라도 대화를 하고 싶었기 때문에 밖에서 담배를 한대 태우시자고 했다. 20년을 애연가로 살다 5년째 금연 중인 나도 담배가 몹시 고팠지만 참았다. 대신 몇 안 되는 담배의 순기능이 사장님에게 적용되는 순간을 잠시 기다렸다.


말씀 주신 것처럼 고용관계는 종료하도록 하자. 나는 가게를 사장님을 비판하거나 비난하지 않았으며 업무구조의 개선을 요청드렸을 뿐이다. 난 이곳에서 일하는 게 좋으며 오래 다니고 싶었으니 오해 없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간결하게 전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고용해 일하며 있었던 서사를 요약해 이야기하는 사장님의 입장도 이해는 되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사장님은 아까보다 훨씬 느긋하고 차분해 보였다. 그리고 고용계약을 마무리하며 이달 급여를 일할계산해 바로 송금해 주었다. 나는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함께 일하던 동료들과 짧은 인사를 나눈 뒤 가게를 나섰다.




예상치 못한 (심지어 생애 첫)해고에 적잖이 당황도 하고 내심 언짢았지만 비교적 어른스럽게 대처한 것 같아 나름의 작은 위안을 삼아본다. 별 일이 다 있다 싶기도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워낙 별 일 없이 살다 보니 더 큰 일처럼 느껴지는 건가 싶기도. 청과상의 경험이 너무 짧게 끝나 아쉽고 이제 더 이상 손가락과 전완에 이 정도의 피로가 쌓일 일은 없겠네 싶어 후련하기도 하다. 청과상으로의 성장은 시작에 조금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라는 걸 느낀 지난 3주 동안 본업의 소중함을 더욱 느끼게 되었다. 앞으로 본업이 어떤 형태로 바뀔지는 알 수 없지만 할 수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그러고 보면 하루 일과가 너무 바빠 도무지 생각이나 고민을 할 새가 없도록 매일을 보내던 지난 3주도 꽤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활동하고 있는 시민합창단에서 준비하는 공연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으니 남은 3월은 본업과 공연연습에 집중해야겠다. 불현듯 하나의 문이 닫혔으니 다른 하나의 문이 또 불현듯 열릴 것이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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