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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채가게

뜸한 글쓰기의 변명

by 진명

매일 글을 쓰고자 했지만 그러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뜬금없게도 야채 소분 업무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침 7시까지 시장에 있는 과일/야채 가게에 출근해 박스에 있는 각종 채소들을 천 원에서 삼천 원 사이의 양으로 소분하는 일이다. 대개 수십 박스쯤 되고 2-3명이 점심 먹기 전까지 끝내야 한다. 아침에 운동을 못한다는 건 아쉽지만 새벽같이 일어나 시장의 활기를 느끼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에 큰 매력을 느꼈고 크지 않지만 부담 없는 고정수익처 하나 정도는 마련해 두어야 올 한 해 본업에서의 변동적 수익을 견딜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였다. 누군가를 후원하기 위해서는 벌이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확실한 고정수익이 있어야 마음 편하게 후원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포함이다.


지원을 했고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해 갔더니 취급하는 제품들 중 구황작물들은 무게가 무거워 가급적 남자를 선호한다고 한다. 최저시급 근처의 업무인데도 60명이나 지원했다고 하고 그중 1명만이 채용이 되는데 그게 나였다는 이야기는 자못 들뜨게 하는 이야기임과 동시에 최근 경기불황이 대단히 심각하다는 걸 체감하게 해 주었다. 망해나가는 자영업이 한둘이 아닌 시기임에도 개업 3년차인 이 가게는 그 사이 점포를 한 개에서 두 개로 늘렸고 연매출은 70억에 달한다고 한다. 아무리 어려운 시기라고 해도 실력이 있으면 좋은 성과를 낸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됐다.


노점상과 더불어 과일, 야채 가게에 대한 관심은 늘 있어왔다. 늘 기업 대 기업의 업무만 해왔지만 사업을 제대로 해보려면 B2C 즉 일반소비자를 대상으로 사업을 해봐야 한다는 이야기들, 그중 과일과 야채를 다루는 업종은 늘 관심사였는데 각종 농작물들의 이름과 상태를 한 번에 제대로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 멋져 보였달까. 가장 좋은 농작물들을 지인들에게 부담 없이 선물해 줄 수 있는 능력도 갖고 싶었는데 그러려면 과일 야채 유통을 해봐야지 않나 싶은 순진한 생각도 있었다. 글을 쓰는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돈만 있으면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는 걸 알고 살짝 허탈. 백화점에 납품되는 제품들 중 최고의 농수산물을 사서 선물하면 끝일 텐데?


하여간 과일 야채 유통업자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 위한 경험과 더불어 여러 가지 생각들로 시작한 야채 소분업무는 여차저차해서 지금까지 열흘정도 일했다. 앞으로 1-2년 정도는 무난히 고정수익처로 가져갈 수 있는 업무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웬걸..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주 6일을 일해야 하고 공휴일 휴무는 없으며 매일밤 10시 안에 잠에 들지 못하면 피로가 심하게 쌓일 만큼 고된 노동의 현장이었다. 서로 바빠 2주 만에 만난 여자친구는 볼살이 좀 빠진 건 좋은데 손가락이 퉁퉁 부어 걱정스럽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실제로 글을 쓰는 지금도 손에 부기가 느껴진다. 오전에 야채소분 업무를 하고 와서 컴퓨터 앞에 앉아 본업을 하고 있으면 손가락이 무거워 몸이 너무 피곤한가? 하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알고 보니 양파, 감자 같은 친구들을 야무지게 소분해 포장하려면 손에 힘을 많이 써야 하는데 덕분에 손가락 마디들이 부었고 그게 반복되니 부기가 빠지질 않는가 보다. 매일 일찍 자고 술도 못 마시고 하니 건강해질 줄 알았는데 본업과의 병행은 적어도 현재까지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니터를 오래 보며 하는 업무는 인공눈물과 함께 하지 않으면 불가능해졌고, 야채를 소분해 포장하고 나면 손가락이 부어 주먹이 꽉 쥐어지지 않으며, 수면이 부족하면 하루종일 아무것도 제대로 못하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 살짝 서글프지만, 이정도면 비교적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현실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꿀 같은 하루의 휴일을 즐겨본다. 아마 시설에 봉사를 간다거나 하는 건 이 일을 정리해야 할 수 있을 것도 같고.. 그 이전에 찾아가고 싶은 시설은 더 이상 외부 봉사자가 필요 없다고 하니 다른 시설들에 연락을 돌려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거나 저거나 쉬운 일이 하나도 없다.


새로 시작한 이 일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본업의 소중함을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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