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아직도 일하는 엄마가 좋아요. 이런 저는 나쁜 자식인가요?
74살의 나의 엄마는 아직도 일을 한다.
어느 날 근무 중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경아, xxx아파트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되노?"
세상이 참 좋아졌구나.
십여 년 전 삶의 터전을 서울로 옮긴 나는 지금의 대구 모습을 엄마보다 모른다. 엄마 역시 그 사실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물어본다. 나는 자연스레 카카오지도 어플을 열고 두 엄지손가락으로 엄마가 물어본 곳을 입력 후 위치를 찾아본다. 그리고는 마치 그곳을 가 본 사람마냥 엄마에게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
"엄마야, 지하철 타고 명덕에서 3호선으로 환승해서 xxx역에서 내리면 된대이. 그리고 4번 출구로 가면 에스컬레이터 있는데 그거 타고 쭈욱 올라가면 바로 앞에 횡단보도가 있다. 그 길 건너면 바로 아파트 단지가 나온다. 바로 거기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하물로 다른 지역에 살고 있지만 나는 엄마에게 설명한다.
이렇게 엄마가 내게 낯선 길을 묻는 전화는 2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평생 노동을 하며 사신 분이다.
돈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 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꽤 오랜 시간 식당의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집 마당에서 어지러움을 느껴 넘어지면서 팔목이 부러졌고 그로 인해 일을 중단하게 되었다.
사실 그동안 칠십이 넘은 노모가 계속 일을 한다는 사실에 가까운 친척들 보기에 민망할 때도 있었다.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에 주변에 말하기도 부끄러웠다. 그러다 보니 비록 엄마가 다쳐서 일을 중단하게 되었지만 우리 삼 남매는 드디어 엄마가 일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좋아했다.
만약 엄마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 까만 머리일 때부터 백발이 될 때까지 고생한 덕분에 엄마는 부자라고는 할 수 없지만, 본인 명의로 대출하나 없는 온전한 집과 얼마 되지는 않지만 월세도 받고 있다. 덕분에 자식들은 엄마 노후에 대한 경제적인 부분으로는 걱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식들이 못나서 엄마에게 걱정을 끼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엄마의 팔목이 회복되기 시작하면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평생 일만 하며 시간을 보냈던 사람이라 일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몰랐다. 엄마는 돈을 쓰는 게 아까웠고, 돈을 벌지 않는 하루는 더 아까워했다. 한편으로는 여가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모르는 삶을 살아온 엄마가 불쌍하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했다. 흠.. 어쩌면 죄송함과 불쌍함 보다는 안타까움으로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할 것도 같다.
건강이 회복된 엄마는 다시 식당 주방에서 일을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령화 시대라 하지만 칠십을 넘긴 엄마를 고용하려는 식당주인은 없었다. 엄마는 좌절을 했다. 평소 화장을 하지 않지만 면접을 보는 날이면 조금이라도 젊고 건강하게 보이고 싶어 곱게 눈썹도 그리고 입술도 생기 있어 보이게 붉게 발랐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엄마의 칠십 년의 세월을 가릴 수는 없는 법.
엄마는 좌절을 했지만 자식들은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엄마도 엄마 나이에 맞게 편하게 남은 여생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엄마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엄마가 새로운 취미를 가지면 좋겠다 생각했지만 그것도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종교활동을 하는 게 어떨까 싶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는 결국 돈이라는 게 조금씩 들어가게 마련인데 돈을 벌지 않고 쓰기만 하는 삶을 매우 아까워했다.
대구에 혼자 사는 엄마가 걱정되어 생각날 때마다 전화해서 무엇을 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나는 엄마의 하루를 그려 볼 수 있었다.
엄마의 하루는 새벽에 일어나 10분 거리의 놀이터와 앞산 빨래터를 산책 후 돌아와 누워서 티비를 보다 스르르 낮잠에 든다. 그러다 자는 것도 지치고 몸이 찌뿌둥해지면 관문시장에 가서 국수를 팔고 있는 고모네 가게에서 시간을 때운 후 시장 한 바퀴 돌고 다시 아무도 없는 빈 집에 돌아와 티비를 보다 다시 잔다. 이것이 내가 파악한 엄마의 24시다.
그러다 보니 안부전화를 할 때마다 잠에서 깬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면 나는 혹시나 무기력으로 인해 엄마가 우울증이나 치매가 발생되지 않을까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우리 삼 남매에게는 매번 엄마의 정신건강이 가장 큰 걱정이며, 이슈이다. 특히나 친언니의 시어머님이 치매에 걸리셨기 때문에 치매환자 가족의 어떤 삶인지 좀 더 가까이 알 수 있다. 치매는 티비 드라마에서만 보는 일이 아니다. 사실 아빠의 암도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극적 장치를 위해 사용되는 소재라고 생각했지 평범한 우리 가정에도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지 11년 전 아빠의 암으로 나는 알게 되었다. 가족의 건강함 그것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의 육체적 건강 못지않게 정신적 건강을 지켜 주고 싶었다. 엄마와 나와 그리고 우리 가족 모두의 평범한 삶을 위해. 그래서 엄마의 목소리가 다운되어 있을 때면 심장이 철렁거렸다.
그런 엄마가 2년 전 갑자기 남의 집에서 밥을 차려주고 청소를 하는 일을 하겠다고 했다. 한마디로 가정부를 하겠다는 한 것이다. 우리 삼 남매는 의아했다. 이게 뭔 소린가? 알고 봤더니 작은 이모가 요양보호사 일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쪽 일에 틈새시장이 있다는 것을 엄마가 알게 된 것이다.
아마 다들 나처럼 칠십이 넘은 노인을 누가 가정부로 고용하냐고 하겠지만 생각보다 엄마를 찾는 곳은 많았다. 경제적 형편은 좋으나 자식들은 떨어져 사는 엄마보다 나이가 더 많은 노인들만 사는 가정이었다. 그곳에서 엄마는 숙식을 하며 집안일을 해준다. 처음에는 엄마가 남의 집에 기거하며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무리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창피하기도 했고, 자식으로서 죄송스러운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말린다고 우리말을 들을 엄마가 아님을 알고 있다.
그렇게 다시 일을 시작한 이후 내가 전화를 걸 때마다 엄마의 목소리에는 생기가 느껴졌고, 나는 엄마의 새로운 직업을 그제야 안심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별도의 사회생활을 하지 않고 넓은 집에 혼자 사는 엄마보다는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분명 스트레스는 받겠지만 사람과 부대끼며 사는 엄마의 환경을 나는 좋아하게 되었고, 엄마가 다시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해했다.
다만 다시 일을 시작한 엄마에게 수시로 말한다.
"엄마야! 조금이라도 아프거나 힘들면 관둬래이! 엄마가 건강한 게 우리 자식들 돕는거대이. 나 엄마 간병 못해준대이!"
매우 매몰차고 불효스러운 말이다. 처음 이 말을 내뱉기까지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세뇌라도 시켜야 되는 것 마냥 수시로 말한다.
사실 어떻게 아픈 엄마를 외면할 수 있겠는가! 우리 엄만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엄만데. 지금도 엄마가 없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글썽인다. 자식한테 피해 주는 것을 싫어하는 걸 알기 때문에 저렇게 말하면 엄마가 무리하며 일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언젠가 아마도 멀지 않은 날 엄마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는 시간이 올 것이다. 그때쯤이면 엄마도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올라오시지 않을까?
현재는 엄마가 자식들이 살고 있는 서울에서 살기를 원치 않는다. 대구는 이모들이 있고, 외삼촌들이 있으며 고모와 작은 아빠네도 있다. 엄마의 평생을 지낸 곳이다. 젊은 사람도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힘들어하는데 칠십이 넘은 엄마는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엄마의 남의 집 가정부일.
일하고 있음이 어쩌면 아직까지는 엄마가 건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일하는 엄마가 아직은 좋고 감사하다.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 일하는 엄마가 좋다고 합리화하지 않으면 불효를 저지르고 있다는 죄책감으로 힘들 수 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상 오늘의 문득, 끄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