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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본능

가엽다는 생각이 든다.

첫 심리 상담을 받으러 갔다. 상담사님과 마주 앉아 명함을 받고 대화를 시작했다. 상담사님은 내가 어제 보낸 글을 잘 읽었다고 하시며 어떤 마음으로 글을 썼는지 물으셨다. 계속해서 이것저것 물어보셨고 나는 현재의 상황에 대하여 감당하기 버거움과 인생을 살아오면서 불편하고 예민한 감정을 느꼈었던 상황을 이야기하였다.


상담사님은 부모와 유대감 형성을 통해 감성적으로 내면이 단단면서 유연하게 발달되기보다는 매일매일 나를 지켜야 된다는 불안으로 예민해지고 생존하기 위한 압박만이 커졌을 거라고 하셨다. 사회생활을 할 때도 내 예상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불안한 마음이 들면 그게 어렸을 때 느꼈던 그 공포심과 겹쳐서 나는 그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작은 상황일지라도 생존이 달린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민해지게 되고 불안해한다고 하셨다.


그 어리고 작은 아이일 때부터 나는 생존하기 위해 불안과 공포 속에 발버둥 쳤을 것을 생각하니 참 가여워서 눈물이 났다. 어렸을 때부터 아빠로 인해 느꼈던 그 불안과 공포의 감정은 현재 성장해서 전혀 다른 상황인데도 느끼는 감정이 동일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부모와의 유대감 형성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신비한 순간이었다. 아무튼 가해자는 없는데 피해자만 덩그러니 있는 것 같았다.


50분은 금방 지나가버렸다. 구구절절 글을 써서 미리 보냈어도 50분의 짧은 상담으로 수십 년간의 내 인생을 돌아보기엔 역시 역부족이었다. 나는 이런 불편한 얘기들을 내 안에서 꺼내 뒤적뒤적 거리는 것에 대하여 너무나도 많은 에너지가 소모됨을 느꼈다. 1-2회만 받으면 되겠지 했으나 10회 정도는 받아야 될 것 같다고 하셔서 약간 부담스러웠다. 한두 번만 받고 싶었는데 10회 정도를 말씀하시니 반복적으로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두려웠고 효과가 없으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그냥 하지 말까 생각도 들고, 하지만 이왕 시작한 거 끝까지 해볼까. 하는 마음도 조금은 들었다. 우선 다음 상담시간에 tci검사와 mmpi검사를 받기로 하고 상담을 마쳤다.


리상담센터 원장님으로부터 정부에서 운영하는 전 국민 마음투자 지원사업을 소개받았다. 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지원금으로 8회 상담을 받을 수 있는 제도였다. 1회당 최대 7만 원을 받을 수 있고 본인 부담금은 중위소득 기준에 따라 나뉜다. 심리 상담이 필요하다는 정신과 전문의의 소견서나 진단서를 첨부해서 신청하면 승인을 받아 금액을 지원해 준다. 이런 제도가 있다는 것이 내심 반갑기도 했지만 상담이 필요한 분들이 많다는 것 같아서 마음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걸어서 1시간 정도 소요되는데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상담사님과 했던 이야기들을 곱씹어보았다. 머리가 너무 아프고 마음이 무거웠다. 유년시절에 더러웠던 아픈 기억들을 꺼내서 그런 거 같다. 아빠의 가정폭력, 성추행, 알콜중독, 방화,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일일이 다 세세하게 뱉어내는 과정들이 좀 괴로웠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나의 밑바닥까지 보인 느낌도 들어서 불편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꼭 좋은 효과를 봐서 내가 좀 더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조금은 들었다.


문장완성 검사에 '내가 바라기에 아버지는'이라는 항목에 '그냥 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라고 적었고, '아버지와 나는'이라는 항목도 있었는데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적었다. 다 잊었다고, 아주 오래된 옛날 일이라고 덮어두고 있었는데 그냥 공포스러워서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형성된 불안정한 인격은 현재까지도 나를 따라다면서 세월도 많이 지났고 전혀 다른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똑같은 감정을 느끼게 하면서 나를 옭아매고 괴롭힌다. 머리카락에 단단히 엉켜 붙은 껌처럼 아주 그냥 지저분하고 못살게 군다. 불안한 감정이 담긴 샌드백이 있다면 진짜 터질 때까지 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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