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비스포크 무풍 에어컨. 새로 산 녹색 나뭇잎 커튼과 잘 어울리는 민트색으로 구매했는데, 디자인도 기능도 마음에 들고 오래 기다리지 않고 설치해서 아주 만족스럽다. 에어컨을 설치해주시는 기사님 말에 의하면 점점 구매고객이 늘어가서 며칠만 있으면 당장 에어컨 구매를 해도 설치까지 2주 이상 걸릴 수도 있다고 한다.
새로운 기술은 늘 사람을 놀라게 한다. 이전에 쓰던 에어컨에 비해 요 녀석은 말도 하고 AI 기능도 있고, 스마트폰으로 집 밖에서 켜고 끌 수도 있다. 세상이 언제 이렇게 발전되었는지 놀라울 뿐이다. 물론 이런 새로운 기술에 익숙한 사람이 있겠지만 나는 여전히 노트북보다 만년필과 노트를 선호하는 낡은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 그렇다. 세상이 나를 두고 휙휙 빠른 속도로 발전해가는 것 같다. 나는 그저 먼 곳에서 세상살이 변하는 것을 신기해하며 감상하고 있다.
6월이어도 제법 날씨가 더운 데다 벽걸이 형과 스탠드형을 한 실외기에 연결해서 써야 하는 상황이라 설치하는데 꽤 애를 먹었다. 물론 내가 애를 먹은 건 아니고 설치기사님들이 일을 많이 하셨다. 나는 기사님들이 제안한 여러 옵션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시원한 보리차를 건넨 것이 전부다. 예상보다 오래 걸린 설치 시간 탓에 한참을 기다리다가 엄마가 일찍 퇴근하고 오셨는데 방에서 글이나 쓰고 있던 나에게 카드를 던지며 미션을 주셨다.
야, 아저씨들 드리게 커피나 사와.
심부름을 가는 동안 문득 엄마가 늘 집에 오는 설치 기사님들이나, 예전에 배달 음식점을 할 때 오는 배달기사님들에게 뭔가를 주던 게 생각났다. 겨울에는 커피나 따뜻한 물, 여름에는 시원한 콜라나 레모네이드 같은 것들. 가끔 혼자 산다는 배달기사님께는 김치까지 챙겨준 일이 있어 나는 괜히 오지랖을 부리는 게 아니냐고 불평한 적도 있다.
기억나는 일화가 있는데 예전에 엄마와 배달 삼겹살 가게를 운영하던 때였다. 나와 엄마, 주방이모 셋이서 일을 했는데 엄마와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주방이모님이 큰 실수를 하셨다. 우리 가게는 늘 삼겹살을 10mm 커팅으로 사용하는데 그날 배달 온 삼겹살은 5mm 커팅으로 얇은 삼겹살이 온 것이다. 그런데 주방이모님은 의식하지 못하고 늘 하던 대로 소금, 후주, 생강가루를 뿌려 밑간을 해버려 나중에 발견했을 때는 반품도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날 배달 온 삼겹살은 200인분에 달하는 양이었으니 금액도 꽤 컸다.
모두가 당황한 사이에 주방이모님은 정말 미안해하셨고 나는 너무 화가 났다.
'아니 늘 하던 일이라고 아무 생각 없이 한 거야? 고기가 저렇게 얇은데 모르고 했다는 게 말이 돼?'
늘 속내를 숨기지 못하는 내 얼굴에는 짜증과 불쾌함이 역력했을 것이고, 주방이모님도 그게 다 보이니 내심 더 안절부절못하신 거다. 그 와중에 나의 엄마는 그저 몇 번 삼겹살을 뒤적여 볼 뿐, 크게 화를 내거나 주방이모님을 나무라지도 않고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항상 의아한 점이 엄마는 사소한 일에는 쉽게 짜증을 내면서 이런 큰 사고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침착함을 유지한다. 그사이 나는 '주방이모님에게 책임을 지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저 삼겹살을 아무렇지 않게 신메뉴 인척 내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엄마는 우리에게"저 삼겹살 기부해야겠다."라고 선언하셨다. 자기가 알고 있는 저소득층 노인 급식 봉사단체에 삼겹살 200인분을 준비해서 나눠드리겠다는 말이었다. 생삼겹살을 그냥 주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직접 고기를 구워서 200인분을 포장해서 준비하겠다는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못 팔게 된 삼겹살도 손해인데 거기다 포장비에 인건비까지 손해 보겠다고? 내가 보기에는 전혀 합리적이지 못한 선택이었지만 엄마의 뜻은 확고했다.
결정을 하고 난 후 모든 준비는 일사천리로 준비되었다. 우리에게 미안해하시던 주방이모, 엄마, 내가 평소보다 두 시간 일찍 출근해 삼겹살을 굽기 시작했고, 미리 섭외한 내 친구와 엄마 친구가 구운 삼겹살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삼겹살 200인분을 굽다 보니 환풍기를 초고속으로 돌려도 매캐한 연기가 가게 안에 자욱했고 삼겹살 기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샤워한 것처럼 축축해졌다. 당연히 옷에 배인 삼겹살 기름 냄새는 말할 것도 없고...
일회용 용기에 넣어 필름으로 포장하고 그걸 박스에 차곡차곡 넣어 총 3박스를 엄마와 엄마의 친구가 차에 싣고 급식소에 간 사이에, 난 얼굴을 씻고 옷을 갈아 입고 가게 오픈 준비를 했다. 그렇게 200인분의 삼겹살은 도시락으로 끼니를 해결하시는 저소득층에게 배달되었는데 엄마는 그걸 사진 한 장 남기지도 않고 돌아왔다. 나는 그 사진이라도 건져서 페이스북에 '착한 가게'로 홍보라도 해볼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사실 그날 일로 엄마에게 많이 놀라긴 했다. 첫째는 주방이모의 실수를 용서하는 엄마의 관대함이었고, 둘째는 손해를 감당하고라도 좋은 일에 쓰겠다는 선택 때문이다.
▣관대함이 선물한 인간관계
당시 주방이모님은 이미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 많이 미안해하고 있으셨는데, 괜히 더 질책하기만 했다면 크게 마음이 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엄마는 실수를 관대하게 이해해 줬고 이후에 주방이모님은 그에 보답하듯 더 열심히 일해주시기도 했다. 용서와 관대함은 상대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서로 더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엄마는 가게를 접은 후에도 그때 일했던 주방이모님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사회에 봉사하는 마음
그 당시 엄마의 마인드는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어쩔 수 없고 좋은 일에 쓰자.'는 생각이었다. 나였다면 특별 이벤트를 진행해서 손님을 끌어모으거나, 원래 계획하던 것처럼 신메뉴를 만들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미 금전적 손해가 발생했는데 그걸 봉사와 선행으로 연결하는 마인드 세팅이 놀랍기만 했다. 사실 이런 생각이 장사꾼의 마음 가짐은 아니었다. 너무 심하게 이익을 추구하지는 않더라도 손해는 보지 않겠다는 자세가 사업을 하는 사람의 기본이 아니던가? 그런 점에서 본다면 엄마가 좋은 사업가는 아니었지만, 위기의 순간에 봉사를 떠올린 점은 늘 그런 걸 마음에 품고 다녔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엄마의 선택은 딸의 존경심과 함께 일하는 사람의 신뢰를 얻었다. 돈이 아니라 사람을 선택한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미술학원을 운영했는데 내가 수업을 빼먹으면 다른 애들보다 더 크게 혼이 났다. "감히 엄마가 미술 선생님인데 네가 수업 빼먹을 생각을 해?"이런 말을 들으며 종아리에 회초리를 맞고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난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규칙을 어기는 일'외에는 대체로 관대한 편이셨다. 공부하기를 강요하지도 않고, 친구들과 놀러 가고 싶다면 두둑이 용돈을 챙겨주시기도 하고, 중학교 때 집에서 파자마 파티를 하라고 집을 비워주시기도 했다.
엄마는 늘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친구들과 함께 하기를 강조하셨다. 나이가 들 수록 주변에 있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니 어렸을 때 친구를 많이 만들어 놔야 한다는 당부였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이웃들과 정을 나누고, 회사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셨다.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공감하면서 늘 사람은 혼자 사는 게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엄마는 초록우산 재단에 10년째 기부를 하고 있다. 물론 그런 걸 먼저 말씀하신 적은 없어서 집에 날아온 뉴스레터를 보고 알았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은 선천적인 게 아닐까? 나는 항상 자기중심적이고 마이웨이 스타일의 사람이라 아무리 후천적으로 노력해도 엄마와 같은 배려심을 가지기가 어렵다. 난 위기 상황이 되면 아무렇지도 않게 나의 이익을 우선하는데, 그럴 때면 항상 엄마의 말이 양심의 소리가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