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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조각 Jun 23. 2021

인생에서 가장 쓰라린 기억

내 꿈을 포기했던 날이 갑자기 생각났다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아뒀던 창작에 대한 욕구가 고3시절에 갑자기 터져나온 것이다. 다행히 미대를 다닌 엄마는 일찍이 내 재능을 알아봤기에 당장 학원에 등록해 미술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기본기가 있어 시작은 수월했지만 한반에 70명씩 들어가 수업을 들으면서 4명의 선생님에게 하루에 1~2분 지도를 받는 시스템이 싫었다. 망설임없이 엄마가 추천해준 작은 화실로 옮겼다.  


    화실 선생님은 우리 나라 최고대학의 한국화전공을 했던 사람이었고 자신이 일찍이 명문대에 학생들 여러명을 보냈다고 자신했다. 집안이 다 법조인들이라 형님들이 판검사고 여동생은 변호사와 결혼했다며 한참을 떠들어댔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담받으러 가서 자기자랑이나 듣고 있을 필요는 없었지만 그때는 나도 뭘 몰랐다.


    화실을 다니고 얼마 후부터는 그 선생님이 카페를 차린다며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았다. 나는 혼자 혹은 한살 어린 동생과 화실에서 과제로 내준 그림을 그리느라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수업료도 다른 곳에 비해 비싸게 받으면서 자리를 비우는 선생님이 못마땅하긴 했지만 대놓고 따질 수는 없어서 꾸역꾸역 다녔다. 얼마후에는 선생님이 화실에 골든리트리버를 데려왔다. 마당도 없는 상가건물에 리트리버를 데려와서 키우겠다는 것도 이해가 안 되었지만 개를 묶어놓고 산책도 안 시키고 똥오줌도 치워주지 않는게 짜증났다. 화실에 오면 매일 지독한 냄새때문에 내가 똥오줌을 닦아주고 불쌍한 리트리버를 데리고 산책을 시켜줘야 했다. 주인이 나쁜거지 개가 나쁜건 아니니까.


    학생이 한명 더 들어와서 총 3명이 되었다. 그 애는 아버지가 의사였고 나보다는 좀 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사실 그 화실에서 우리집이 제일 평범했다. 의사 아버지를 둔 딸과 잘 나가는 건축 사무소 소장 아버지를 둔 딸, 그리고 평범한 회사원 아버지를 둔 나. 선생님은 은연중에 우리 아버지의 벌이를 물어봤고 나는 그게 참 불편했다.


    수능을 치고 난 후에 예체능 학생들은 집중적으로 실기를 준비한다. 그러나 나는 수업료로 500만원을 지불하고도 혼자 오전 10시부터 저녁 10시까지 그림을 그릴 때가 많았다. 선생님이 자주 자리를 비우는 것에 불만을 품은 학생이 부모님과 함께 항의하러 온 적도 있다. '저 애는 그래도 부모님이 와주시는구나.' 못내 부러웠다.


    실기 시험을 쳤을 때 알았다. 나는 합격권에도 들어가지 못할 만큼 형편없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불합격 통보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날 밤에 선생님은 자신이 열심히 가르치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1년 더 준비하는 동안은 무료로 수업을 해주겠다고 말했다. 일찍이 한량같은 선생님에게 실망했기에 그 제안이 그리 달갑지 않았고 예상대로 수업의 질이 갑자기 좋아진 것도 아니었다.


    어느날은 새 학생이 상담을 받으러 왔다. 의사 딸이라며 좋아하는 선생님의 얼굴을 보면서, 나와 상담할 때처럼 자기 자랑을 일장연설로 읊는 그를 보면서 깨달았다.


'저 사람은 원래 저런 인간이구나. 내가 여기서 더 붙어 있어봤자 시간만 낭비할 거야.'


그를 시험해보려고 원래 준비하던 학교가 아닌 다른 학교에 원서를 넣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넌 공짜로 다니는데 내가 가르치던 것도 아니고 다른 학교 준비를 도와줄 수는 없다고, 그리고 내가 무료로 수업을 해주겠다고 하면 너도 양심껏 100만원이라도 내겠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다.


'하, 그게 당신의 진심이구나.'


그 얘기를 듣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난 새 학생이 학원에 오는 시간에 일부러 나타나서 선생님과 소리를 지르면서 싸우기 시작했다. '당신의 무책임함이 내 인생을 망쳐놨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싸웠다. 그 선생님은 자기가 미안하다고 했다면서 그렇게 무료로 다니기로 했으면 네가 일찍 와서 개똥도 치워놓고 화실도 정리해 놔야 되는거 아니냐고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그때는 나도 참지 않았다. 먼저 수업을 제대로 안 한건 당신이고 내가 여기 청소부로 온 것도 아닌데 개똥을 왜 치워야 하냐고, 난 이미 수업료를 다 지불했을 때도 당신이 화실에 안 와서 어쩔수 없이 똥을 치워야 했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던진 그 선생님의 말이 나를 폭발하게 했다.

 "다른 의사집 딸들은 월에 천만원도 주고 다니는데 넌 500만원 준게 아깝니?"

그 뒤로는 완전히 이성을 놔버려서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엄마에게는 자세히 말 하지 않고 그냥 짐을 빼야겠다고 말했다. 선생님이 없는 사이 내 짐을 챙겨 나왔고 얼마후 다른 미술학원을 다녔다. 새로 만난 미술학원에 여자선생님은 나를 진심으로 안타까워 했고 도와주고 싶어하셨다. 나도 복수심과 독기로 똘똘 뭉쳐 열심히 실기를 준비했고 그림 실력도 하루가 다르게 쑥쑥 늘어났다. 그렇지만 수면부족과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몸이 금새 축나기 시작했고 심장 부정맥, 위염, 방광염, 어깨 통증, 허리 통증 등으로 병원을 전전하고 약을 한웅큼씩 먹으며 버텼다. 실기 시험 직전에는 제법 자신있는 실력이라고 자부했고 수시 시험에도 후보 2번이라고 결과를 받았다. 대학의 입시팀에 문의해보니 후보 2번이면 거의 90%의 확률이라고 했고 엄마와 나, 선생님 모두가 결과를 기대하고 있었다.


결과는 10%의 확율로 불합격이었다.


크게 낙심했지만 정시까지 남았으니 흔들릴 수 없었고 끝까지 버텨야 했다. 그렇지만 이미 내 체력은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어느날은 위염약과 방광염 약을 동시에 먹고는 약 부작용으로 응급실에 갔고 스트레스로 윗입술이 붓거나 눈이 아파서 눈을 반쯤 감고 그림을 그렸어야 할 때도 있었다. 압박감이 극심했는데 어디도 해소할 곳이 없어서 학원 선생님이 교회에 데려가 주셨다. 조용한 기도실에 무릎 꿇고 앉아서 간절하게 기도했다.


 "조금만 더 버티게 해주세요. 꼭 대학에 합격하게 해주세요."


날 믿어주는 가족들과 선생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고, 그 전에 다니던 화실 선생님에게 보란듯이 내가 합격한 걸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정시에 원서를 3곳에 넣었고 2곳은 실기를 준비하고 1곳은 건축관련학과에 성적으로만 지원했다.


결과는 미대는 다 불합격하고 성적으로 지원한 대학에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전혀 기쁘지 않았다.


입시가 끝난 후에 혼자 강가에 앉아서 흐르는 강물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이대로 빠져 죽기에는 너무 억울한데. 세상이 진짜 나한테 너무 가혹한 거 아니냐고.'


그 뒤로는 하얀 도화지가 완전히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렇게 간절하게 입시를 준비하던 때가 떠올랐고 그 노력이 다 물거품이 된 것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그림을 그리게 된 일이 있으면 남들이 모두 잘 그린다고 칭찬해 줬지만 애써 외면하려고 했다.

'잘 그려봤자 충분하지는 않아서 원하던 학교도 못갔는 걸. 보잘것 없는 잔재주에 불과한 거지.'


아무 성과도 없는 재능은 저주에 불과하다고 자조하면서도 그때 쓰던 미술도구는 하나도 버리지 못했다.


나는 잊고 싶은건지 잊고 싶지 않은 건지.


원래는 다른 글을 쓰려고 햇는데 갑자기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 기억이 자기도 세상에 나오고 싶다고 발버둥 치는 것 같다.


열심히 했는데 잘 안됐어.
간절하게 꿨던 꿈인데 포기했어.
포기한줄 알았는데 사실 아직 포기 못한 모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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