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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조각 Jun 07. 2021

우리 만나지 말라고 눈을 가렸겠지

유라가 쓰고 부르는 <세탁소>의 가사

    망한 연애를 추억할 때에도 즐거운 기억이 하나쯤은 남는 법이다.


    오랫동안 내 글을 읽어 준 독자들은 내 연애사에 등장한 그들이 어떤 상처와 숙제를 남기고 떠났는지 알겠지만, 모든 시간이 다 최악이었던 건 아니다. 내가 끝끝내 그들을 미워하지 못한 것은 함께 한 시간 동안 쌓은 몇 안 되는 소중한 추억들 때문이다.


    그 사람은 내가 가끔 밤에 악몽을 꾸고 울면서 전화를 할 때마다 잠결에도 내 전화를 받아 주었다. 그렇게 혼자 우는 밤에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참 나를 안심하게 해 주었다. 졸린 목소리로 내 투정을 받아주다가 다시 잠들어서 전화기 너머로 색색 대는 숨소리를 들릴 때는 나보다 20cm는 더 큰 그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를 만나고서야 지난 내 삶이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알았다. 그렇게 처음 만난 사람에게 너무 많은 마음을 주고 그 관계가 비참하게 깨진 것이 고통스러워 그 뒤로는 남자 친구에게 새벽에 전화하는 일은 없다. 외롭고 슬퍼도 혼자 울고 말 일이다. 마음을 너무 기대면 늘 관계에 을이 된다. 내 슬픔은 내가 위로하는 것이 어른의 연인 법이다.



    다른 연애에서는 의외로 나의 여성성을 발견하기도 했다. 늘 나의 외모와 여성성에 못내 콤플렉스가 있던 나는 그가 나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예쁘다고 말해준 것이 고마웠다. 나 자신이 충분히 여성스럽지 못해 열등감이 있다는 말에는 의아한 말투로 "내가 만나본 여자 중에서 네가 제일 여성스러워."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해준 것도 기억한다.


    나도 몰랐던 부드러운 애정을 끌어내 준 사람이었다. 그는 가끔 내 발을 닦아 주려고도 했고, 밤새 일하고 한 숨도 자지 못하고 피곤한 상태로 나를 만나러 오기도 했다. 너무 무리하는 걸까 봐 조금 밀어내고 덜 만나려 한 것은 나였다. 그때 나는 오랜만에 만난 사랑이 너무 소중해서 조금씩 조금씩 아껴 사랑하고 싶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아낀 관계 또한 어이없고 당황스럽게 깨질 줄은 몰랐다.


    결말을 알고 우리의 첫 만남으로 돌아가면, 나는 그와 과거의 내가 만나지 못하게 나의 눈을 가렸을까?


    아니. 나는 과거의 나에게 지금 이 순간 마음껏 아끼지 말고 사랑하라고 속삭여줬을 것이다. 어차피 깨질 테지만 이 사랑은 참 아름다우니 아끼지 말고 남김없이 다 사랑하라고. 아끼던 보석이 깨진 것을 조각조각 붙여보려 해도 불가능할 테니, 아름다울 때 마음껏 즐기렴.


    돌이켜 보면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었다. 내 젊은 날의 사랑에는 늘 최악만 있던 것은 아니라 더 놓지 못한 것이다. 조금만 더 버텨보면, 조금만 더 노력하면 다시 뜨겁게 사랑한 날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밤새 통화하던 설렘과 곧은 눈빛으로 사랑을 말하던 날들과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했던 시간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이 지난 후 지불해야 했던 지독한 슬픔과 고통...


    잊을 수 없는 기억들 감정의 파도를 타고 뭍으로 흘러올 때가 있다. 무의식의 바다에 버려놓은 그와의 추억들이 의식의 해변가에 쓸려 온 것을 발견하듯... 이런 센티멘탈은 다 지난 사랑을 그리워하는 노래 가사 때문이다. 새벽에 혼자 이런 노래는 듣지 말았어야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BO1XLNqz4no

세탁소-유라


세탁소 앞에 내가 맡긴 외투 속에
하얀 쪽지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난 또 울지
그거 네가 줬던 편지였는데

조금만 울어요
차갑고 무거운 것들은 버려요
환상 속에 너는 어린아이예요
발끝에 닿는 이불이 내 친구네요 음

추억을 두 눈으로 봐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아
너와 마주했던 그 순간으로 가서
우리 만나게 하지 말라고
내 눈을 가렸겠지

사랑 때문에
울고 웃는 이 순간들도 다 fallen
잔뜩 겁을 먹고 있어도 난 좋아
밀린 빨래들을 해치워 버리자 음

세탁소 앞에 내가 맡긴 외투 속에
하얀 쪽지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난 또 울지
그거 정말 아끼던 거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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