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름조각 Aug 09. 2021

뜨거운 여름밤, 우리의 젊은 날

잔나비가 부르는 <뜨거운 여름 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 없지만>

    잔나비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올드팝이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로 빛바랜 감성이 느껴졌다. 마치 우리 부모님의 젊은 시절 사진을 발견한 느낌이랄까? 살짝 색이 날아가서 외곽선이 흐려지고 오른쪽 아래에는 주황색 글자로 날짜가 찍힌 사진 말이다. 1980년대쯤 이문세가 진행하는 라디오에서 누군가의 사연과 함께 나올법한 노래. 그런 묘사가 잔나비의 감성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을까 싶다. 


    훗날 인생을 돌이켜 봤을 때 특별하게 남은 낭만적인 순간이 있을까? 60살, 70살이 되어서 젊은 날을 돌이켜 봤을 때도 그날을 떠올리면 그 순간 느낀 설렘에 소녀처럼 얼굴을 붉힐 수 있는 순간이 있을까? 지난 시간들을 찬찬히 돌이켜보니 몇몇 짧은 순간의 짜릿한 설렘은 있었다. 사실 그런 순간을 위해서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닌가 싶다. 연애를 하면 서로 싸우기도 하고 이별의 고통도 크지만, 그 짧은 순간의 달콤함이 너무 커서 또 쉽게 사랑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이야기를 조금 해봐야 할 것 같다. 모두들 비슷비슷하게 가난하던 시절, 6남매 중 장녀인 어머니와 가난한 집의 둘째 아들이던 아버지의 연애도 그리 풍족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남자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던 아버지는 남은 동전까지 탈탈 털어 데이트를 하더라도 돈 없는 티는 절대 내지 않았다. 엄마를 집에 데려다주고 나면 버스를 탈 차비도 없어서 집까지 뚜벅뚜벅 걸어갔다고 하셨다. 대구의 북구에서 남구까지, 4시간을 걸어서. 그럼 11시에 헤어져도 새벽 3시는 되어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에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아신 건 결혼한 지 20년이 지나서였다.  


    그런 때가 있었다. 성격이 너무 다르고 매일 의견 차이가 심한 나의 부모님께서 30년 넘게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저런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서투르고 가난하던 시절에도 서로를 아껴주었던 시간들과 짧은 감동의 순간들이 힘든 결혼생활도 쉽게 내버리지 않게 지탱해주는 것이다.  


    흔히 부부를 전우애라고 웃픈 소리를 하지만 생사가 오고 가는 전장에서 피어나는 전우애를 가진다는 것이 일반적인 남녀의 사랑보다 조금 더 높은 수준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낭만 속에서 서로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던 연애시절에는 알 수 없던 부족한 모습, 추한 모습. 숨기고 싶었던 어두운 면을 다 들키고도 서로의 곁을 지키는 관계에서는 어떤 감정이 느껴질까? 밤새 우는 아기를 번갈아 안고, 같이 돈을 모아 조금씩 집을 키워가면서, 마침내 생때같은 자녀가 다 자라서 대학에 가고 결혼을 하는 모습을 보는 그 지난한 세월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삶의 전쟁터에 함께 선 나의 든든한 전우, 내 등을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 그런 의미의 배우자라면 전우애라는 말이 숭고하게 느껴진다. 


    뜨거운 여름밤처럼 생기가 넘치던 젊은 시절, 불타오르는 사랑을 하고 이제는 그 모든 시간이 지나 눈앞에 있는 건 배 나온 아저씨와 주름진 아줌마가 되어버린 부부. 이제는 서로에게 애교를 보이는 것도 어색하고 같이 꼭 껴안고 자는 것보다 따로 자는 게 편하지만, 한 명이 아프면 언제라도 들쳐업고 병원에 갈 수 있는 관계이다. 


    앞으로 둘은 점점 더 볼품이 없어지겠지. 피부는 주름지고, 눈도 침침하고, 먹어야 할 약이 늘어나고, 키도 점점 줄어든다. 염색으로도 새치를 가리기 힘들고 어느새 거울을 보는 게 싫어진다. 그럼에도 서로의 얼굴을 보면 젊은 시절, 사랑스럽고 생기 넘치던 그날이 떠오르겠지. 


    오늘의 글에 어울릴 만한 시를 한편 덧붙이려 한다. 문태준 시인의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이란 시집의 동명의 시이다.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문태준


당신은 나조차 알아보지 못하네

요를 깔고 아주 가벼운 이불을 덮고 있네

한층의 재가 당신의 몸을 덮은 듯하네

눈도 입도 코도 가늘어지고 작아지고 낮아졌네

당신은 아무런 표정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네

서리가 빛에 차차 마르듯이 숨결이 마르고 있네

당신은 평범해지고 희미해지네

나는 이 세상에서 혼자의 몸이 된 당신을 보네

오래 잊지 말자는 말은 못 하겠네

당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네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을 보네

    


우리의 마지막 시든 얼굴에서도 당신의 젊고 아름다웠던 때를 기억하겠소...

    아래의 영상은 잔나비의 라이브 영상중 제주도에서 원테이크로 찍은 영상이다. 통기타 소리, 제주의 바람소리, 보컬 최정훈의 목소리와 제주도 풍경,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영상미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그날의 분위기, 두 사람, 배경과 흐르는 음악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순간들이, 우리의 인생에도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  


https://youtu.be/cidZ41v73wU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잔나비

그땐 난 어떤 마음이었길래
내 모든 걸 주고도 웃을 수 있었나 아 예 예 예
그대는 또 어떤 마음이었길래
그 모든 걸 갖고도 돌아서 버렸나 아 예 예 예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또다시 찾아오는
누군갈 위해서 남겨두겠소

다짐은 세워 올린 모래성은
심술이 또 터지면 무너지겠지만 아 예 예 예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또다시 찾아오는
누군갈 위해서 남겨두겠소

그리운 그 마음 그대로
영원히 담아둘 거야
언젠가 불어오는
바람에 남몰래 날려보겠소

눈이 부시던 그 순간들도
가슴 아픈 그대의 거짓말도
새하얗게 바래지고

비틀거리던 내 발걸음도
그늘 아래 드리운 내 눈빛도
아름답게 피어나길

눈이 부시던 그 순간들도
가슴 아픈 그대의 거짓말도
새하얗게 바래지고

비틀거리던 내 발걸음도
그늘 아래 드리운 내 눈빛도
아름답게 피어나길

눈이 부시던 그 순간들도
가슴 아픈 그대의 거짓말도
새하얗게 바래지고

비틀거리던 내 발걸음도
그늘 아래 드리운 내 눈빛도
아름답게 피어나길


사진출처

매거진의 이전글 도도하고 사랑스럽지만 조금 멍청하고 귀여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