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를 가르치는 사회

사회의 조건화에서 벗어나는 길

by 구름조각

나는 수치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성격유형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지 어떻게 평가할지는 내가 상관할 영역이 아니라고 선 그어 버린다. 그들도 눈이 있고 입이 있으니 보는 대로 뱉는 것뿐이지, 그들의 평가는 나의 본성과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옷을 고를 때도 내 몸에 편한 것이 최고고 그다음은 가격이 합리적이어야 하고 그다음은 내 눈에 예쁜 것이다. 그래서 무릎 나온 운동복도 빈티지 원피스도 새빨간 블라우스도 내가 좋아하면 잘 입고 다닌다. 유행은 뭐... 나와 상관없는 그들만의 리그 같은 것이다.


그렇게 남 눈치 안 보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수치스러워하는 것들을 보면서 수치심을 학습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브래지어 끈, 생리대나 몸에 달라붙는 옷 같은 것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주변의 다른 여자들이 부끄러워하고 숨기면 왠지 나도 '이걸 부끄러워해야 하는 일인가?'하고 무의식적으로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


1. 브라 끈 패러독스(Paradox, 역설)

요즘 노브라도 유행한다지만 나에게는 해당사항 없다. D컵 이상인 내 가슴은 지지대 없이는 영 불편해서 살 수가 없기 때문에 나에게 브래지어란 패션이 아니고 깁스 같은 것이다. 신체 부위를 적당히 고정시켜 놓는 지지대 역할이랄까?


특이점은 여기에 있다. 움직이다 보면 티셔츠가 한쪽 어깨로 흘러내려 브래지어 끈이 노출될 때가 있는데, 꼭 다른 여자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숨겨준다. 정작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친히 옷매무새를 단속해 주는 걸 보면서 감사해야 할지, 거절해야 할지 애매한 기분이 든다. 그들은 호의인데 내가 불편한 상황... 모두 한 번씩은 겪어봤겠지? <쇼미 더 머니> 같은 프로그램에 나오는 남자 래퍼들은 팬티가 다 보이도록 바지를 내려 입곤 하던데 '그들 주변에도 이렇게 호들갑을 떨면서 바지를 추슬러주는 남자들이 있을까' 궁금하다. 아니면 내 브라 끈은 패션이라 보이기 힘든 디자인이었던 게 문제의 핵심일 수도 있겠다.


정말 고민이 되는 부분은 다른 사람들의 브라 끈을 봤을 때이다. '이걸 말해줘야 하나, 웃을 추슬러 줘야 하나...' 내가 학습한 바로는 브라 끈은 숨겨야 할 것인데, 상대의 입장은 나처럼 이런 오지랖을 불편해 할 수도 있고, 나름대로 패션이라고 꺼내놓은 걸 수도 있고, 그에게는 이 모든 고민이 중요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그럼 나는 이래저래 고민을 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어 버린다. 그 사람의 옷은 그가 알아서 할 일이지, 내가 불편할 것도 없는데 괜히 참견할 문제가 아니다.


2. 뒷골목 생리대

가끔 급할 때 생리대가 없으면 여자들끼리 빌려주기도 하는데 마치 할렘가에서 마약 밀수하는 것처럼 꾹꾹 뭉쳐서 몰래 건네주는 게 참 신기하다. 물론 여자들 사이에는 암묵적인 배려의 제스처이기도 한데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배려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여자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생리대가 필요하다고 하면 머리 위로 휙휙 던져주기도 했는데 확실히 생리대를 숨기는 배려심은 남자들이 있을 때 생기는 것 같다.


이와 비슷한 부분이 생리통 문제다. 회사에서는 아파서 끙끙 대면서도 아무 말 못 하고 점심시간에 몰래 병원에 다녀오기도 한다. 누군가 생리통 때문에 힘들다고 하면 모두들 입은 다물고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많이 아프냐? / 나도 자주 아파. / 내가 먹던 진통제 있는데 줄까?/ 아까 먹었는데 좀 더 참아볼게.

아까 말했듯 긴장감 넘치는 뒷골목 마약 거래 현장처럼 눈빛과 표정, 제스처로만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다. 이 순간에 어느 눈치 없는 남자가 "무슨 일이야?"라고 순수한 질문이라도 던지면 어색한 침묵, 냉정한 정색을 보게 되겠지.


3. 옷 입기 눈치게임

옷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 게 우리나라에서 옷 잘 입는다의 기준을 살펴보면 유행에 맞는 옷, 너무 튀지 않는 옷, TPO(시간-장소-목적)에 맞는 옷을 입는다는 의미가 있다. 본인이 입고 싶은 걸 입거나 자신의 개성대로 입는 옷은 별로 환영받지 못한다. 물론 지드래곤 같은 연예인 얘기가 아니고 일반인들의 기준이다. 이런 암묵적인 기준에 어긋나는 옷차림은 뒤에서 수군대거나 조롱거리로 삼아 수치심을 주면서 모두 비슷하게 입도록 교육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있다. 레깅스 입고 다니는 여자를 뒤에서 사진 찍어 인터넷에 올린다던지, 요즘은 왜 저렇게 입고 다니냐고 친구들과 욕을 한다던지. 정작 레깅스 입은 여자에게는 한마디도 안 하지만 이렇게 글을 올림으로써 같은 커뮤니티, 친구 그룹의 멤버들 사이에 암묵적인 룰을 만드는 것이다. '우린 저렇게 입지 말자.'


이런 분위기가 제일 강한 게 결혼식 하객 패션이다. 결혼하는 신부를 빛내줘야 하기 때문에 신부보다 덜 예뻐야 하면서, 과한 노출 없이 격식에 맞는 옷이기도 하면서, 분위기에 맞는 화사한 옷(근데 흰색, 베이지색, 레몬색은 안됨)을 골라 입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내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 한번 입고 말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입을 만한 옷에 지금 유행도 고려해야 한다.


나는 결혼식 가서 축의금까지 줘야 하는데 이렇게 옷까지 머리 아프게 고민하다 보면 이게 다 누굴 위한 건지 모르겠다. 내 돈 써서 옷 사 입고 결혼식 참석해서 축하도 하고 돈도 주고 와야 한다니... 이래서 사람들이 기를 쓰고 남들과 비슷한 시기에 결혼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뿌린 만큼 거둬야지) 그런데 만약 눈치 없이 밝은 색 옷을 입거나 너무 눈에 띄는 옷을 입으면 친구들 사이에서 눈치 없다고 뒤에서 욕먹기 십상이다. 그래서 난 장례식과 결혼식 옷을 통일하기로 했다. 둘 다 검은색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고 결혼식에는 귀걸이를 할 것이고 장례식엔 안 하고 가야지. 옷 사기 귀찮은 내 꼼수다.


사회화 교육방식 처벌 vs 수치심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사회화 교육을 받고 산다. 처벌직접적이고 적극적인 사회화 교육방식이라면 수치심을 주는 것은 간접적이고 소극적인 방식의 사회화 교육이다. 예를 들면 아이가 오줌 쌌을 때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는 것은 신체적 고통으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각인시키는 직접적 사회화 교육(처벌)이다. 혹은 아이에게 키를 씌워서 이웃들에게 소금을 얻어오게 만들기도 하는데 이건 창피를 당하게 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는 사회화 교육이다. <검정 고무신>에나 나올 법한 예시를 들어서 이해가 안 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다른 예로 간통죄가 폐지되면서 더 이상 불륜에 대한 처벌이 어려워졌기 때문인지 불륜에 대한 사회적 조롱, 평판 훼손 같은 일들이 많아진 것 같다. 불륜은 나쁜 일이지만 더 이상 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으니 그에 대한 반발로 일어나는 일이다. 불륜한 연예인들을 댓글로 조롱하고 욕하고 그 연예인이 출연한 광고 제품이나 영화를 불매하면서 까지 수치를 주면서 동시에 주변에도 은연중에 가르치는 것이다. '너희들도 불륜하면 저 꼴 날 거야...' 누군가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은 자신도 돌에 맞을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두려워한다.


사회의 수치심 교육

이렇게 사회에서 서로에게 수치심을 주면서 사회 구성원들끼리 가르치고 있다. 작게는 가족, 친구들, 회사 내 조직, 지역사회, 국가... 점차 커지는 공동체의 규모에 따라 부끄러워해야 할 일들의 목록도 점점 많아진다. 여자들에게는 몸을 수치스러워하게 만들고 남자들에게는 강하지 못함을 수치스러워하게 가르친다. 여자가 울 때는 위로받기 쉽지만 남자가 울 때는 주변에서 놀림받기 쉽다. 그런 분위기는 여자인 나에게도 분명한 불편함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감정을 억압하는 남자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을까?


여자들에게는 엉덩이가 큰 것도 작은 것도, 가슴이 큰 것도 작은 것도, 입술이 큰 것도 작은 것도, 키가 큰 것도 작은 것도 은연중에 창피한 일로 교육한다. 엉덩이가 작으면 납작해서 엉덩이 뽕을 넣고, 엉덩이가 크면 상의를 크게 입어 가린다. 인스타그램에서 큰 엉덩이를 과시하는 여자들도 많지만 그건 운동을 많이 해서 탄력 있는 애플힙에만 해당되지 직장인들의 펑퍼짐한 엉덩이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 걸 보고 있으면 저 많은 조건들의 필터링을 다 거치고도 살아남는 여자가 몇 명이나 될까 싶다. 김태희도 키가 작아 탈락이고, 전지현도 가슴이 작아서 통과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사회적 조건화에서 개별화로

사회는 부끄러움을 가르쳐 사람들을 길들인다. 알아서 움츠러들게 만들어야 사회가 요구하는 무리한 의무에도 적당히 싫은 내색 없이 받아들이고, 처벌 규정이나 공권력을 강화하지 않고도 사람들이 서로 눈치 주게 만들어서 쉽게 교화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사회는 나에게 수치를 가르쳤다. 그렇게 은연중에 학습한 것들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초자아(Super-Ego)가 되어 일종의 자기 검열을 한다. 그러나 그렇게 사회의 조건에 맞춰서 내 자아를 억압하는 것은 팔다리를 잘라내어 상자 속으로 밀어 넣는 만큼의 고통과 모욕을 준다. 잘 순응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지금 우리 시대가 변하는 방향은 점점 사회적 조건화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개별화가 강해지는 쪽으로 변하고 있다. 예전처럼 모두 비슷한 시기에 결혼해서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아 비슷하게 살지 않게 될 것이다. 각자 삶의 방향성이 다를 것이고, 각자의 속도가 다를 것이며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가 고유한 개인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더 이상 서로를 쉽게 이해하는 일은 줄어들겠지만 서로 다름을 존중하면서 각자의 영역을 지키는 방향으로 살아가게 될 것 같다. 그리고 서로 다름을 존중한다는 건, 다른 것을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겠지. 일단 나부터, 이제 자기 검열은 그만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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