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채식주의자..02

100간의 채식과 탄수화물 끊기 챌린지

by 구름조각

충동적인 결정은 늘 후회를 가져온다. 사실 내가 채식을 선언한 순간, 생각보다 못 먹는게 더 많다는 걸

깨달았다. 거기다 정제 탄수화물과 가공식품도 끊겠다고 선언했으니 진짜로 먹을 수 있는게 없는 것이다. 당장에 소, 닭, 돼지 고기를 못먹고 만두나 순대도 안 먹게 된다.


흰쌀밥, 빵, 면 종류도 안 먹게 되니 먹을 수 있는 건 현미밥에 감자, 고구마, 연근 등 구황작물들 뿐이었다. 설탕을 안 먹으니 모든 종류의 달콤한 음식과도 멀어졌고, 과당을 피하려 과일도 안 먹었다. 이 정도면 건강하겠지 싶은 올리고당, 조청 포함 자일리톨과 에리스리톨 같은 설탕대체품도 먹지 않았다.


뭐니뭐니 해도 가장 큰 유혹은 라면이다. 빨간 국물에 쫄깃 탱탱한 한국인의 소울푸드 라면. 라면 없이 100일을 버티는 건 곰과 호랑이가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만 먹는 것과 유사한 고통이다. 그렇게 사람이 되어보자는 심경으로 시작했지만 솔직히 100일 중에 라면은 2번 먹었으니, 나는 웅녀가 되지 못하고 뛰쳐나온 호랑이인 셈이다.


거의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마음으로, 동물에서 사람이 되려는 마음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승려의 마음으로 먹는 것에서 오는 모든 쾌락을 거세했다. 그 스트레스로 머리가 술술 빠지긴 했는데 음식 제한을 200일만 더 했어도 바로 산에 들어가 승려가 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먹는 것에 대한 통제와 갈망을 일기장에 기록해가면서 내 신체와 내면을 관찰했다. 초등학교 시절 슬기로운 생활 시간에 배운 탐구일지를 떠올려주면 좋겠다.


신체적 변화

▶ 현미밥을 국그릇으로 먹는데도 살이 쭉쭉 빠진다. 특히 배가 홀쭉해진다.

▶ 수면 시간이 줄어들었다. 평소에는 8시간을 자도 피곤했는데 식사제한을 할 때는 5~6시간 정도만 자도 저절로 눈이 떠졌다.

▶ 제철 채소에서 단맛을 느끼기 시작했다. 간장으로 볶은 고구마줄기나 무 조림같은 반찬들이 정말 맛있게 느껴졌다. 가공식품을 멀리한 만큼 신선한 채소들로 요리를 하는 일이 많아졌고, 내 손으로 밥을 지어 먹는 일이 즐거워 졌다.

▶ 의외로 육식에 대한 갈망이 그리 크지 않았다. 진짜 참을 수 없는 욕구를 느낀 부분은 탄수화물과 설탕이다. 인간의 정서적인 만족감은 대부분 탄수화물에 의존하고 있는 것 같다.

▶ 피부에 기름기가 싹 사라졌다. 코와 턱의 피지도 사라지고 트러블이 전혀 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피부가 조금 건조해지기도 했지만 그 당시가 여름이어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 처음 식단을 바꾼 열흘동안은 끔찍한 변비에 시달렸지만 그 이후로는 화장실에서 정말 편안하게 변을 봤다. 갑자기 식단을 바꾸면서 생긴 일종의 적응기간이 있었던 것 같다.


심리적, 내면의 변화

▶ 정신적으론 계속 먹고 싶은 것을 참는 스트레스가 있었고 그 때문에 머리가 많이 빠진 것 같다. 고기를 먹기 시작하면서 탈모는 멈추었다.

▶ '뭔가를 먹고 싶다'는 끊임 없는 식욕에서 자유로워 졌다. 배가 부른데도 더 먹거나, 다음에 뭘 먹을지를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내지 않게 되었다.

▶ 정작 사람이 집착하는 부분은 고기에 대한 욕구보다 단맛에 대한 욕구라는 걸 알았다. 따지고 보면 고기에 곁들이는 다양한 양념들과 면, 밥이 없으면 고기를 많이 먹기 힘들다. 소고기에 소금, 후추만 뿌려 먹으면 그렇게 많이 먹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쌈장, 파절임, 각종 반찬과 된장말이 밥, 냉면 같은 걸 더해서 먹어야 만족스러운 한끼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실제로 식욕의 트리거(trigger)는 고기의 기름진 맛보다는 같이 먹는 양념의 단맛이다.


가끔 먹고 싶은 음식을 '내 몸이 원하는 영양소'라고 합리화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 우리 몸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영양소를 섭취하려 음식을 먹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왜 지방, 탄수화물과 다량의 단백질과 나트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숯불에 구운 돼지 갈비'라는 구체적인 음식을 먹고 싶다고 생각할까?


▶ 탄수화물이란 영양소는 얼마든지 대체 될 수 있는데 왜 콕집어, 마카롱이 먹고 싶다고 생각할까?


▶ 만약 마카롱과 영양학적으로 같은 열량, 같은 영양소로 구성된 음식을 먹으면 '마카롱을 먹고 싶다'는 욕망이 사라질까?


보통 우리가 '먹고 싶다고 느끼는 것'은 생존을 위한 필요를 넘어선 욕망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리고 음식에 대한 욕망을 느끼는 순간부터 이것이 해소될 때까지 채워지지 않는 갈망으로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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