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중진담일랑 넣어둬

맨 정신에못할 이야기라면 술 먹고도 하지 말자

by 구름조각

어떤 사람은 술자리를 좋아하지 술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나는 술을 좋아하지 술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맛있는 안주와 그에 어울리는 술을 곁들여 기분 좋게 먹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건 나 자신에 대한 대접이고 소소한 행복 중 하나다. 그 이유는 누구도 나에게 술을 권하지 않고 내가 먹지 않은 안주에 대한 값도 지불할 필요가 없고 온전히 나의 필요와 욕구에 의해서 주종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술자리를 거북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건 대학교 첫 엠티부터다. 친한 사람들과 마시는 술이 아니라 친해지기 위해 마시는 술은 상당히 강박적이다. 어색함을 알코올로 애써 잊어보려는 노력들이 영 불편하다. 자연스럽게 친해지면 안 되는 걸까?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그렇게 술을 마시면서 평소에는 하지 못한 말을 풀라며 갑자기 야자타임을 하자거나 진실게임을 하자고 한다. 난 그럴 때 꼭 투명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입을 다물고 얌전히 구석에 앉아 있다. 나는 본능적으로 느낀다. 솔직하게 말하라는 저 말이 거짓말이다. 저 판에 잘 못 껴서 말실수라도 하면 여기서 완전히 왕따가 될 것이라는 강한 위기감이 드는 것이다.


야자 타임

야자 게임의 문제는 선후배 관계나 교수와 학생, 상사와 부하직원 같은 위계질서의 긴장을 풀어주는 척하면서 사실은 상급자의 권력을 확인시키는 게임이라는 점이다.


술기운을 빌려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막말을 하거나 짓궂은 농담을 던지면서 모두들 신나게 웃을 수 있는 건,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이 위계질서가 전혀 변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불과 10분 남짓의 게임이 끝나면 상급자들은 으레 다시 자신의 권력을 확인한다. "너 아까 뭐라 그랬어?" "우리 후배님이 평소에 나한테 불만이 많았구나?" 이런 멘트에 깨갱하는 하급자를 보면서 모두 웃는 패턴... 지겹다.


이런 종류의 놀이는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의 전투를 놀이로 즐기는 귀족들의 태도 같다. 이 게임의 룰도 상급자의 권한이고, 이 게임을 시작하고 끝내는 것도 그들의 권한이다. 하급자들은 그 안에서 대드는 모션, 평소에 할 수 없는 막말을 던지면서 그들의 즐거움을 맞춰주는 광대가 된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야자 게임이라고 해도 진짜 문제의 핵심을 지적하거나 상대의 인격 자체를 언급하는 것은 원천 금지되어 있는 점이다. 야자 게임 시작 후 선배에게 "원래 그렇게 기회주의자처럼 행동하니?"라는 말이나, "지난번에 네가 할 일 다른 후배한테 떠넘긴 거 내가 봤어." 이런 건 야자 게임에서 언급해선 안된다. 그러니 애초부터 서로 터놓고 이야기 하자는 그 말은 공허한 슬로건이고 이 위계질서 안에서 솔직함은 죄악이라는 사실만 확인하는 게임인 것이다.


진실게임

야자 게임이 권력관계의 반전을 유머 코드로 가져오는 것이라면 진실게임은 남녀 간의 치정을 유머 코드로 이용하는 것이다. 진실게임을 하자며 모두들 술에 얼큰하게 취해서 촛불이든 술잔이든 하나씩 들고, 서로의 눈치를 보는 그 분위기 속에는 평소에 고백하지 못했던 호감을 '비겁하게' 술기운을 빌려 털어놓자는 심산이 깔려 있다. 잘되면 사귀는 거고 잘 안되면 술이나 분위기 같은 요소로 빠져나갈 구멍이 많다.


그러나 그런 고백들은 대체로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리가 깔려 있기 때문에 진실게임에서 고백해서 실제로 커플로 이어지는 경우는 잘 없고 그 날밤 이불 킥이나 다음날 어색한 관계가 되는 걸로 끝이 난다. 그럼 정말 진실게임에서 이득을 보는 이는 누구냐면 그 치정관계를 관망하는 제3자들이다. 게임판에서 흥미진진하게 남녀의 설레는 분위기를 감상하고 그 다음 날 두 사람의 어색한 분위기를 웃음거리로 삼으면서 그 뒤로 알음알음 소문을 만들고 매번 술자리마다 안주거리로 삼는 사람들. 그런 호사가(남의 일에 흥미를 가지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진실게임은 재밌는 안주거리를 찾기 위한 덫에 불과하다.


이런 진실게임에서도 절대 언급해선 안 되는 게 있다. "사실 내가 널 좋아했어."는 가능하지만 "사실 너 진짜 꼴 보기 싫어."는 금지어다. 진실하자고 진실게임을 했지만 진짜 진실하면 그 자리에서 쌈박질이 난다. 그러니 진실 게임의 진실도 반쪽짜리 선택적 진실에 불과하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싫어하거나 불편해하거나, 그 사람의 문제점을 언급하는 것은 퇴출 사항이다.


술자리의 분위기가 불쾌하고 어색한 이유는 이런 게임들 뿐만 아니라 모임이나 공동체, 조직 내의 불편한 인간관계를 술로 대충 덮고 가려는 안일함이 보여서이다. 어떻게든 좋게 좋게 넘어가자며 괴롭힘도 선배의 애정으로 포장하고, 무례함도 친해지려는 장난으로 넘어가는 게 꼴불견이다.


나와 친해지고 싶으면 말짱한 정신과 깔끔한 얼굴로 나와 대화를 나누면 좋겠다.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고 나의 생각을 진지하게 듣고 서로 공감대가 있을지 찾아보면 되는 것이다. 공감대가 없더라도 이해는 못할지언정 존중은 할 수 있지 않나? 그런데 왜 꼭 술에 취해서 같이 바보짓을 하고, 다음날 숙취로 괴로워하는 과정을 거쳐야 친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의문이다.


술 먹고 친해졌다고 착각하는 건 알코올이 뇌를 마비시켜서 판단력이 흐려진 것뿐이지 진짜 친해진 게 아니다. 다음날 숙취가 깰 때쯤 다시 어색해지고 그 어색함을 잊으려 또 술을 마시고 그런 멍청한 짓을 몇 번 반복하면서 우리가 친해졌다고 느끼지만 나중에 보면 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러니 친밀함은 맨 정신일 때 쌓고 취중진담일랑 넣어두길, 내일 아침에 다시 얘기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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