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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조각 Feb 02. 2023

미미는 어디에 있을까?

<미미_- 유라

    짧게 머리를 잘랐다. 쇄골뼈 아래로 늘어진 머리칼들이 귀 밑에서 달랑 끊어졌다. 가벼워진 머리 때문에 목 뒤가 서늘했다. 마른 머리카락들이 바닥에 수북하게 쌓였다. 머릿속에 스쳐가는 누군가가 나에게 머리카락은 기억이라고 말했다. 과거의 내가 그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이가 말한 것 같기도 하다. 말은 남고 말한 사람은 지워졌나. 기억의 파편을 더듬어 찾아낸 과거 속엔 미미가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미미는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투명하게 하얀 피부와 검은 단발머리. 큰 눈에 오똑한 코를 가진 미미는 누가 보기에도 예쁜 얼굴은 가졌다. 가느다란 팔다리와 나긋나긋한 허리가 야릇하여 남자들의 추파를 늘 의식해야 했다. 청순한 외양과는 다르게 웃음소리는 명랑하고 경박했다. 그것이 묘하게 남자들을 자극했는지도 모르겠다. 미미가 크게 입을 벌리고 웃으면 '도도하거나 멀지 않고 쉽게 닿을 수 있는 예쁜 여자'와 같은 인상을 주었다. 미미를 보면 남자의 육체를 가진 누구라도 한 번쯤은 아랫배에서 뜨겁게 차오르는 어떤 것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미미는 남자 친구가 생기면 단발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남자와 추억을 쌓으면서 길어지는 머리를 보면서 함께 한 시간을 세어본다고 했다. 나에게 머리카락은 이미 죽어버린 단백질 세포가 길게 이어진 것뿐인데, 미미에게는 추억의 단상들이 영사기 필름처럼 늘어지는 것처럼 생각한 모양이다. 귀 밑에서 끊어진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리는 미미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 예쁜 눈에는 기대감이 잔뜩 담겨 있었다. 길러질 머리카락만큼 쌓을 행복한 시간을 꿈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후 미미의 머리칼이 제법 길어진 어느 날 문득 궁금해졌다.

“이제는 행복해?”

그때 미미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질문에 대한 미미의 답은 기억나지 않았고 얼마 후 곧 미미의 머리가 다시 짧아졌다는 것만 떠올랐다.


    여러 번 사랑에 실패하여 미미는 좀처럼 짧은 머리를 길러내지 못했다. 한 남자와도 수없이 만나고 헤어지는 동안 미미의 머리칼은 채 쇄골뼈에도 닿지 못하고 잘려나갔다. 조금 머리가 길었나 했을 때는 손가락만 한 굵기로 거친 파마를 말아버렸다. 그 머리를 보고 나는 큰 소리로 웃어버렸다.

“복잡한 심경을 머리로 표현한 거야?”

우리는 입을 크게 벌리고 눈꼬리를 접으면서 뱃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웃긴 일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큰 소리로 웃어버리는 것이 미미와 내가 닮은 점이었다. 그리고 그 웃음에는 늘 불안한 슬픔이 숨어 있었다. 사랑하는 남자와 안정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는 슬픔. 사랑에 목말랐던 두 여자는 웃음으로 서로를 위로해주곤 했다.

    미미와 나는 공통점이 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고 예술을 사랑하고 세상의 도덕 따위에는 관심 없는 냉소주의 같은 것들이 닮았다. 여러 닮은 점 중에서도 우리는 운명을 믿는 것이 닮았다. 운명을 믿는 자들은 간절히 원하는 것들은 가질 수 없고 도무지 알 수 없는 힘이 소중한 것들을 빼앗는 고통을 여러 번 겪은 자들이다. 운명은 늘 원하던 것들은 주지 않고 전혀 다른 도착지로 등을 떠밀었다. 뼛속 깊이 좌절하여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갈망하는 것. 미미와 나의 가장 큰 공통점이었다.


    반면 우리는 같은 슬픔 속에서 다른 선택을 했다. 미미는 병들고 어긋난 사랑으로 허전한 속을 채웠고, 나는 사랑을 거부하고 믿지 않았다. 미미는 오고 가는 수많은 남자들의 헛된 품속에서 꿈을 찾고 있었다. 사랑받고 또 사랑받는 꿈. 미미가 사랑을 말하며 그렁그렁한 눈을 할 때마다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사랑이라는 게 진짜 존재하긴 하는 거야?"

그 질문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내 안에 고여 있다. 그러나 사실 정말 궁금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 미미는 사랑이 뭔지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그 젊은 날을 다 바쳐 사랑에 목을 매었던 걸까? 그래서 지금 미미는 어디에 있는 걸까?

    시간이 지날수록 맑고 투명했던 미미의 눈도 지치고 희었던 피부도 조금씩 바래기 시작했다. 미미를 처음 봤을 때는 그 얼굴 가득히 차오른 발그레한 생기가 퍽 사랑스러웠다. 그 빛을 잃고 조금씩 모나기 시작한 미미의 얼굴이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미미는 다른 사람으로 변하고 있었다. 나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는 미미의 남자와 닮아가고 있었다. 미미는 덜 웃고 종종 경멸하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그 눈을 마주한 사람들 모두가 상처를 받고 미미를 떠나갔다. 난 미미의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미가 그의 앞에서 어깨를 움츠리는 것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이다. 미미는 종종 울면서 나에게 전화했다. 그 남자는 말로, 손으로, 침묵으로 미미를 아프게 했다. 미미의 사랑은 비극으로 치닿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난 그 남자보다 미미가 더 미웠다. 정확히는 그 남자를 닮아가는 미미가 싫었다. 짐승에게 목이 물린 가축처럼 무력하게 늘어지는 미미가 역겨웠다. 떠나겠다고 여러 번 약속하면서도 좀처럼 떠나지 못하는 미미가 가여운 동시에 한심해 보였다. 미미와 대화할 때 동정하고 공감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속으로는 미미가 그 남자를 떠나지 못할 이유들을 세어보고 있었다. 어차피 미미는 버려지기 전까지는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내가 사랑했던 미미는 점점 사라질 것도 분명했다. 미미는 그 사람 곁에서 그를 닮아갈 것이다.


    우정은 사랑의 배다른 동생이다. 닮은 듯 다른 듯 사랑과 우정은 경계가 흐릿하다. 난 미미와의 관계에서 우정도 사랑처럼 피었다 지는 감정이라는 것을 배웠다.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을 미워하게 되듯이 사랑했던 미미를 미워하게 되었다. 자신을 아프게 하는 남자를 놓지 못하는 미미. 가련한 미미. 그러나 늘 소중한 친구였던 미미. 사랑과 증오와 연민과 원망이 뒤섞인 감정들 속에서 미미와 나는 점점 더 멀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난 후, 나무들이 고개 숙인 계절. 미미처럼 짧은 머리가 되고서야 그의 외로움을 읽어냈다. 


    지금 미미는 어디에 있을까? 하얀 입김이 흩어지듯 허무하고 아련한......


사진 출처

링크를 누르시면 제가 좋아하는 가수 유라의 인터뷰가 있습니다. 유라는 이 앨범을 준비하면서 머리를 잘랐고, <미미>라는 곡을 '그리움'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했어요. 그녀의 창작과정과 짧은 머리에서 떠오른 것이 있어 글로 적었습니다. 과거의 파편들이 재구성된 이야기는 사실이라기 보단 허구에 가까워요. 짧은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어주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SJY89GLEkcE

<미미> -유라

이마에 미끄러진 먼동의 싹이
뜨거워질 만큼 그대가 떠오르네
예쁘게 뜨겁게 하네


헛된 품에서 꿈을 찾는 내가
어린 자국을 더듬어 보는 내가
슬프게 눈물 나게 하네


착한 마음 나쁜 마음
죄가 되지 않을 만큼만 덜어내
나쁜 마음 그 나쁜 마음
너의 못된 숨은 누구의 목을 물게 되니

착한 마음 그 나쁜 마음
저 나무는 고개 숙일 계절을 안 건지
나쁜 마음 그 나쁜 마음
그 예쁜 손 그 예쁜 눈


미미하게 사라져
미미는 왜 날 떠났어
사랑은 왜 없어져
친구야 날 좀 찾아줘

미미하게 사라져
미미는 왜 날 떠났어
우리는 다시 만나서
우리는 다시 우리는 다시


잠과 잠 좀 자야지의 사이
뜨거워질 만큼 그대가 떠오르네
예쁘게 뜨겁게 하네


날이 밝을 때까지 해야지
여린 풀을 뜯고 있던 내가
슬프게 눈물 나게 기억나게 하네


착한 마음 나쁜 마음
죄가 되지 않을 만큼만 덜어내
나쁜 마음 그 나쁜 마음
너의 못된 숨은 누구의 목을 물게 되니

착한 마음 그 나쁜 마음
저 나무는 고개 숙일 계절을 안 건지
나쁜 마음 그 나쁜 마음
그 예쁜 손 그 예쁜 눈


미미하게 사라져
미미는 왜 날 떠났어
사랑은 왜 없어져
친구야 날 좀 찾아줘

미미하게 사라져
미미는 왜 날 떠났어
우리는 다시 만나서
우리는 다시 우리는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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