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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조각 Jan 09. 2023

사람은 이상하고 사랑은 모르겠다.

이예린의 「사람은 이상하고 사랑은 모르겠어」

넌 좀 긍정적일 필요가 있어.

    J가 말했다. 그는 내가 너무 부정적인 인간이라고 했다. 나와 함께 있으면 알 수 없는 불안이 느껴진다고 했다. 거대한 벽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네 말이 맞아. 난 늘 불안을 느껴." 입에서 문장이 떠난 뒤에도 입맛이 썼다. 아마 J가 나를 이해하는 일은 평생 없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을 늘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나에게는 소소한 행복의 순간들이 있었다. 세상은 늘 나의 걱정과 불안보다는 다정한 곳이었다. 오늘은 무사히 지나갔다는 것에 안도하고 가족들과의 소박한 식사에서 온기를 느꼈다. 뉴스에 나오는 작은 소식에도 움츠러드는 인간에게는 평안한 일상이 더없는 행복이다.


    반면 J에겐 늘 세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다. 변변찮은 직업도 없이 몇 년째 시험공부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 시간 동안 사랑했던 여자들과의 관계도 망가졌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늘 자신의 생각보다 부족하다고 느꼈다. 사람들은 멍청하고 정부는 무능하고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낙천주의, 긍정주의의 함정이다. 세상의 좋은 점만 보려는 이들에게는 마땅히 존재하는 나쁜 점이 큰 실망이 된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사랑하는 것과 미운 것이 뒤섞인 이 땅에 무엇하나 간단한 것이 없다. 그중에 꼭 그림자만 보려는 사람이 있고 빛만 보려는 사람이 있다. 전자가 나라면 J는 후자의 인간이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실낱같은 빛도 희망이 되었고, J에게는 희미한 그림자도 좌절이 되었다.


    근본적으로 J와 나는 세계관 자체가 다른 인간이었다. 우리는 평행선을 달리며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J의 눈빛이 다정하게 느껴질 때마다 나는 그에게 가 닿고 싶었다. 그를 더 이해하고 경계를 무너뜨리고 하나가 되고 싶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성은 사랑을 읽어내지 못한다.


    "사랑해"라는 문장에는 두 명의 청자가 있다. 한 명은 상대방이고 다른 한 명은 나 자신이다. J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뱉을 때마다 그 말에 내 귀로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앞으로도 너를 사랑할게'라는 자기 암시와도 같았다. "사랑해"라는 문장은 선언과도 같고 주술과도 같다. 사랑을 소리로 뱉어낼 때마다 내가 누굴 선택했는지 상기하게 된다. '나는 앞으로도 너를 사랑할 것이다.'라는 속뜻을 내포한 말로 두 사람을 묶어주는 서류 없는 계약인 셈이다. 음성은 형체 없는 구속력을 가진다.


    J는 그 무게가 싫다고 했다. 사랑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책임이 불편하다고 말했다. 나와는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또다시 거대한 벽을 마주한 기분으로 J를 바라보았다. 그의 언어에는 묘하게 강한 힘이 있었다.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와 정돈된 표정으로 그의 결정을 존중하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J는 내 표정이 울 것 같다고 말하며 자신의 죄책감을 삼켜냈다. 그와 헤어진 후 집에 와서 깨끗하게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다 뒤늦게 울음이 터졌다. 입에서 터져 나오는 나의 울음소리를 두 귀로 들으면서 이 슬픔이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되뇌었다. 그것은 '사랑해'라는 말과는 다른 자기 암시의 효과를 냈다.


    J는 날 사랑할 수 없다고 했지만 계속 관계를 이어가고 싶다고 했다. 남은 것은 나의 결정뿐이었다. 미묘한 감정과 이름 붙이지 못하는 관계 속에 머무를 것인가, 떠날 것인가.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를 좋아했지만 그의 결정을 존중하고 싶었다. 여러 번 J는 나를 사랑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것이 현실적인 이유에서든 감정적인 이유에서든. 그는 나에게 목줄을 매지 않았다. 난 언제든 자유롭게 떠날 수 있었다. 누구를 사랑할지는 선택할 수 없어도 누구와 관계를 맺을지는 선택할 수 있다.


    사랑을 시작하지 않았으니 이별이란 단어를 꺼내는 것이 머쓱하게 느껴졌다. 지난 기억을 더듬어 오고 간 감정을 헤아려봐도 우리의 관계를 규정할 마땅한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J는 '사랑한다'는 말 대신 '애정이 있다'는 말로 에둘러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곤 했다. 애정. 사전에서 찾아보니 ‘사랑하는 마음’이란 뜻이란다. '사랑'과 '사랑하는 마음' 사이의 빈 공간을 응시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현실적인 기반이 부족했던 걸까, 현실을 잊을 정도의 열정이 부족했던 걸까? 아니면 서로를 '사랑'으로 선택할 의지가 부족했던 걸까? 결론은 그저 사랑이 될 수 있는 역치를 넘지 못했다는 것 뿐이다.


    '헤어지자'거나 '그만 만나자'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런 말은 J와 나의 관계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침묵을 선택했다.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고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반응하지 않음'이라는 태도를 취하면서 J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와의 첫 만남에서 난 '대화는 마치 정신적인 섹스와 같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과는 몸의 대화도 잘 통할 것 같다는 기대를 품게 된다고 했다. 어느날 J가 말하길, 첫 만남에서 그 말을 했던 내가 정말 섹시해 보였단다. 나는 그의 품을 파고들면서 배시시 웃었다.


"너 꼬시려고 일부러 그런 말 한 거야."


     스쳐가는 기억 속에서 몇 번 더 전화벨이 울렸다. J는 똑똑해서 내 침묵의 의미를 금방 깨달았다. 더 이상 벨이 울리지 않았고 그는 내 인생에서 퇴장했다. 사랑이라기엔 미지근하고 우정이라기엔 애틋한 감정으로 보낸 시간들은 그렇게 끝이 났다.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은 우리에게 딱 어울리는 결말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veuMLnly88&t=0s

<사람은 이상하고 사랑은 모르겠어>-이예린

사람은 이상하고

사랑은 모르겠어 

난 잘 모르겠어


사람은 이상하고

사랑은 모르겠어

난 잘 모르겠어

 

가볍고 쉬운 마음

기억도 못 할 말들

우린 무뎌지기나 하지

아름다운 것들은 다 어디에

비겁한 당신들 다 나 같아

 

사람은 이상하고

사랑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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