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나카시마 미카
어린시절의 동경, 나나
고등학생 시절, 모든 친구들이 버킷 리스트 같은 것들을 적었다. 오로지 대학입시만을 위해 살며 모든 즐거움과 자유가 통제된 상황에서 유일한 숨구멍 같은 것이었다. 나중에 대학에 가면 무엇 무엇을 하겠다는 환상들. 어떤 친구는 쌍꺼풀 수술을 하겠다고 했고 어떤 친구는 긴 여행을 떠나겠다고 했다. 우리는 각자의 허무맹랑한 꿈을 들으면서 잠시나마 자유를 느꼈다. 그것은 사막을 횡단하는 사람이 홀리고 마는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당시 나의 버킷리스트에는 기타를 배우겠다고 적혀 있었다. 1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 기타는 손에 잡아보지도 못한 것을 보면 그리 간절한 꿈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여전히 기타를 치면서 무대 위에서 주목받는 록스타가 되는 것이 나의 은밀한 환상이다. 위태롭지만 아름답고 갸녀린 몸매에 홀리는 목소리로 노래하는 록스타. 때로는 사랑에 배신당하지만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가고 소중한 친구들과의 우정을 쌓는 여자. 그렇다. 나는 '나나'가 되길 꿈꾸었다.
만화와 영화 그리고 전설의 OST
'나나'는 2000년부터 일본에서 연재된 순정만화다. 만화가 야자와 아이는 '나나' 이외에도 <파라다이스 키스>나 <내 남자친구 이야기> 등의 만화를 연재했다. 고마츠 나나와 오사키 나나라는 같은 이름의 두 여자 주인공이 기차에서 만나 친해지게 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두 사람의 인생과 사랑 이야기뿐만 아니라 주인공의 패션과 화려한 일러스트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이후 나카시마 미카가 출연한 실사화 영화 '나나'의 OST Glamorous Sky는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이 곡은 일본의 유명 밴드 라르크 앙 씨엘의 Hyde가 작곡하고 만화가 야자와 아이가 직접 가사를 붙였다. 워낙 인기가 있던 탓에 여러 아티스트들이 이 노래를 커버하기도 했지만 원곡의 나카시마 미카의 매력을 따라잡지는 못했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발라드 <눈의 꽃>을 부른 청초하고 갸녀린 목소리가 강렬한 록밴드의 사운드와 어우러지면서 허스키하고 묘한 매력을 주기 때문이다. 비비안 웨스트 우드의 액세서리를 하고 무대에서 노래를 하는 나카시마 미카의 이미지는 나나 그 자체였다.
2013년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삶에 치여 오랫동안 그녀를 잊고 살았다. 그러나 유튜브 알고리즘이 나카시마 미카의 영상을 소개했다. 그녀가 2013년 발표한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의 라이브 영상이었다.
영상 속 미카는 시든 꽃처럼 앙상했다. 기억 속 나나의 반짝이는 젊음과 아름다움이 사라진 것만 같아 서글펐다. 어쩐지 노래를 하는 내내 힘겹게 발버둥 치는 것처럼 보였다. 노래 가사마저도 너무 진지하여 죽음이나 삶에 대해 말하는 철학자 같았다. 내가 아는 나나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모습이었다. 잊고 지낸 사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영상을 본 뒤 나카시마 미카에 대해 찾아보았다. 2010년 미카는 양측 이관 개방증이란 희귀병이 악화되었다. 이 병은 소리를 낼 때 목소리가 울려서 말을 하면 마치 양동이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고 한다. 자신의 호흡소리와 다양한 이명때문에 박자와 음정을 맞출 수가 없다. 가수에게는 치명적인 병이다. 영상 속 그가 힘겹게 발버둥 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박자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온몸을 흔들고 발을 쿵쿵대면서 마치 자신을 괴롭히는 병과 싸우듯 노래했던 것이다.
다행히 최근 나카시마 미카에게 희소식이 들렸다. 치료하기 어렵다는 양측이관개방증이 완치된 것이다. 코로나로 생활패턴이 바뀌고 긴 휴식을 취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청력이 돌아왔다고 한다. 다시 음정을 맞춰 노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며 앨범을 준비하고 있다. 나카시마 미카가 전곡의 작사 작곡에 참여하여 본인의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내는 앨범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가 힘든 시기에 삶과 노래를 포기하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5월에 발매될 앨범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도 죽지 않아야 하는 이유
삶에 너무 진지한 사람들이 있다. 슬픔을 오래 참고 감당하지 못할 만큼 책임지려 하고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전전긍긍하는 사람들. 사는 것에 너무 진지하여 가볍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남의 잘 못도 자신의 잘못으로 받아들이고 마는 사람들은 남을 탓하지 않고 자신을 탓하다 마음에 병이 들고 만다. 착하지만 독하지 못하고, 똑똑하지만 모질지 못하여 생기는 병. 그 무게에 짓눌려 점차 죽음에 가까워지고 만다.
견디고 견디는 사람들이 끝내 스러지고 말 때 옆에 있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까? 소중한 사람이 병이 들고 아름다운 꽃이 지고 빛나는 별이 저물 때 무력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의 사춘기 한 페이지에 남은 영원한 나나가 부른 노래를 듣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절규하는 듯 갈라지는 목소리, 박자를 맞추려 높은 하이힐을 신고 발을 구를 때마다 휘청이는 가녀린 몸, 그럼에도 위태롭게 어긋나는 박자와 계속 이어지는 노래. 자꾸만 무너지지만 계속 살아가려는 의지. 그녀는 노래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죽을 이유가 되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살아갈 이유가 된다.
*가사의 내용을 음미하기 위해 일본어 가사는 빼고 해석본만 올립니다. 누군가의 일기장이나 한 편의 시를 감상하듯 읽어주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C6st9z_iaao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나카시마 미카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괭이갈매기가 부둣가에서 울었기 때문이야
물결에 밀리는 대로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과거도 쪼아먹고 날아가라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생일에 살구꽃이 피었기 때문이야
그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빛으로 선잠에 들면 벌레의 사체와 흙이 될 수 있을까
박하사탕, 항구의 등대, 녹슨 아치교, 버려진 자전
나무로 지어진 역의 난로 앞에서 어디로도 떠날 수 없는 마음
오늘은 마치 어제와 같아 내일을 바꾸려면 오늘을 바꾸어야 해
알고 있어 알고 있어 하지만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마음이 텅 비어 버렸기 때문이야
채워지지 않는다며 울고 있는 것은 분명 채워지고 싶다고 바라기 때문이야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신발끈이 풀렸기 때문이야
고쳐 매는 건 서툴단 말이야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야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소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야
침대 위에 엎드려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어 그 날의 나에게 미안하다고
컴퓨터의 희미한 빛, 윗방의 생활음
인터폰의 차임벨 소리, 귀를 틀어막는 새장 속의 소년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고 있는 다다미 여섯 칸 단칸방의 돈키호테
골은 어차피 추레한 것이야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차가운 사람이라고 불렸기 때문이야
사랑받고 싶다며 울고 있는 것은 사람의 따스함을 알아 버렸기 때문이야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당신이 아름답게 웃기 때문이야
죽는 것만 생각해 버리고 마는 것은
분명 살아간다는 것에 너무 성실하기 때문이야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아직 당신을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야
당신 같은 사람이 태어난 세상을 조금 좋아하게 됐어
당신 같은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에 조금은 기대해 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