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무거울 때는 소화가 잘되는 음식
고민이 있을 때는 청소를 합니다. ‘나 밖‘에 있는 것들을 정돈하면서 ’내 안‘을 정돈하는 작업인 셈이죠. 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들이고 세제를 뿌려 물걸레 기계로 닦은 다음 손걸레질을 한번 더 합니다. 무릎을 꿇고 바닥을 자세히 보면 기계로 놓친 부분이 있거든요. 손걸레질을 하고 나면 다시 청소기를 한번 돌리고 밀대로 다시 한번 닦습니다. 청소가 집요해질수록 고민이 깊다는 뜻이죠. 마음의 번뇌를 닦아내듯 마룻바닥을 보송보송하고 반질반질하게 닦아 냅니다.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시점이에요. 모든 선택은 후회와 미련이 따른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인지 나이가 들수록 선택이 점점 어려워집니다. 당분간은 갈팡질팡한 채로 마룻바닥이나 닦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런 상태를 경상도 사투리로는 '상그랍다'고 하거든요. 성질이 사납다는 의미도 있지만, 상황이 위태롭다는 뜻도 있고요. 시끄럽고 정신없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활용하기로는 이런 예문이 있겠어요.
"하이고 마, 정신 상그랍다. 니 쫌 가만있어봐라."
=시끄러우니 가만히 있으렴.
저는 요즘 속이 상그랍네요. 마음속도 뱃속도 말이죠.
어렸을 때부터 소화기관이 약해서 조금만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면 곧잘 체했어요. 손가락 열개, 발가락 열개를 바늘로 쿡쿡 찔러 검은 피를 뽑은 적도 많아요. 한약이든 양약이든 소화제는 달고 살았고 스트레스가 많은 수험생일 때는 내과를 밥 먹다시피 갔었죠. 위내시경까지 해봐도 별다른 이상이 없대서 답답했었죠. 지금 생각해 보니 정신적인 어려움이 몸의 통증으로 나타나는 '신체화' 증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글쓰기로 조금 마음을 풀어내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지금도 소화제를 물처럼 들이켜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느날 유튜브에서 영상을 하나 봤어요. 시골할머니가 농사도 짓고 밥도 있는 모습을 찍은 영상인데, 가만히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전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랐지만 할머니 손에서 컸기 때문에 그런 영상을 보면 왠지 모를 노스탤지어를 느껴요. 할머니 손을 잡고 삐약삐약 소리 나는 애기신발을 신고 시장에 가던 때나 할머니 방앗간에서 가래떡이니 참기름을 뽑는 냄새가 그립기도 하고요.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으로 시골할매 채널의 영상을 오래오래 봤더랬죠.
https://www.youtube.com/watch?v=xlOP1nTzewQ
시골 할머니께서 만드신 음식은 다 맛있어 보였지만 유독 눈길을 끄는 음식이 있었어요. 무밥과 달래장인데 할머니는 무수밥과 달롱개장물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여기에 나승개(냉이) 한주먹 넣고 끓인 시골 된장찌개가 얼마나 맛있어 보이던지요. 냉이 튀김, 냉이 무침에 마무리로 쑥버무리까지 해서 맛나게도 드시던데요. 쑥, 냉이, 달래 봄나물 가득한 밥상을 보니까 침울했던 기분도 봄처럼 화사해지는 것 같았어요. 그 영상을 보고 봄나물이 먹고 싶다고 하도 성화를 내었더니 어머니께서 장에 가서 달래를 사다 주셨습니다.
시골 할머니는 흰쌀 위에 채 썬 무를 넣고 밥을 하셨어요. 저는 현미랑 귀리로 밥을 할 거라 냄비에 불을 올려 한소끔 끓여줍니다. 약불로 불을 낮출 때쯤에 채 썬 무를 올려주세요. 오랜만에 꺼낸 무쇠냄비가 맛있는 밥을 완성해 줄 겁니다. 그 사이 달래를 꺼내 쫑쫑 썰어주세요. 멸치간장에 다진 파, 다진 마늘, 달래, 통깨에 참기름 듬뿍 넣고 고춧가루도 조금 넣어줍니다. 레시피랄게 없죠. 이게 다 할머니 손맛입니다.
무는 소화를 돕는다고 하죠. 뜨끈한 무밥에 향긋한 달래장을 넣어 슥슥 비비고 한 입 먹으니까 입안이 가득 향긋해집니다. 통깨와 참기름 듬뿍 넣은 달래장도 너무 맛있어요. 물엿이나 설탕은 넣지 않았지만 무가 달고 담백해서 충분히 맛있습니다. 흰쌀로 무밥을 해서 꼭꼭 오래 씹으면 더 달게 느껴질 거예요.
사람은 음식을 먹을 때 단순히 영양소를 섭취하기 위해서 먹지는 않아요. 맛있는 음식이 주는 즐거움을 위한 목적으로 먹기도 하고 사교활동의 수단으로 음식을 이용하기도 하죠. 가끔은 가까운 사람과 친밀감을 확인하거나 정서적인 만족감을 위해서 음식을 먹기도 하고요. 오늘 무수밥과 달롱개장물은 저의 정서를 어루만져주는 음식입니다. 마치 할머니께서 거칠고 따뜻한 손으로 뒷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많이 먹어. 먹고 더 먹어."
어린 시절 받았던 사랑이 고픈 요즘입니다. 따뜻한 무수밥이 상그러운 마음을 잠잠하게 해 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