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에세이 이야기
요리는 분명 고된 작업입니다. 그날 먹을 것을 정하고, 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하고, 볶고, 찌고, 굽고, 끓이는 과정에서 먹는 사람의 입맛에 맞춰주고, 주방과 식탁의 뒷정리까지. 밥상에서 긴 시간을 보내지 않는 한국인의 특성상 5시간이 걸려 만든 요리도 5분 만에 '해치워'버리기 일쑤죠. 음식을 하는 사람의 마음까지 헤아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 허탈함을 이겨내고 누군가에게 매일 밥을 지어준다는 것은 분명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이란 본디 상대의 필요를 채우는 일이기에.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음식을 통해 사랑을 표현하고 관계를 이어나가는 이야기를 보여줬어요. 음식을 조리하는 과정 자체로도 훌륭한 시청각적 자극을 줄 수 있죠. 알록달록한 채소나 신선한 생선과 고기가 기름 위에서 지글지글 구워지거나 냄비 속에서 보글보글 끓는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순식간에 눈과 귀를 사로잡히고 맙니다.
'먹는다'는 보편적인 행위는 공감을 끌어내기 좋고 다양한 음식을 매개로 여러 에피소드를 연결하기도 쉬워요.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은 각 음식마다 이야기의 중심인물이 달라져요. 한 음식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조명되는 옴니버스 형식입니다. 드라마 대장금은 음식을 통해 성장하고 경쟁하는 주인공의 서사를 보여줍니다. 상궁마마와 장금이의 관계성, 라이벌 금영이와의 대결, 민정호와 러브스토리에서 애정과 경쟁심을 표현하는 도구로 음식이 등장합니다.
생각해 봤습니다. 수많은 음식 드라마와 영화 중에서 꾸준히 한 사람에게만 정성껏 차린 음식을 대접하는 이야기가 있을까요? 일본 영화 <461개의 도시락>이 떠오르네요. 밴드 보컬인 아버지가 고등학생 아들에게 3년간 매일 도시락을 싸주었답니다. 도시락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린 것이 인기를 끌었지요. 이 실화는 에세이가 되었고 영화가 되었어요. 아들과 아버지가 도시락을 통해 교감하는 내용으로 영화의 분위기는 아기자기하고 다정합니다.
그에 반해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는 절박하고 먹먹한 분위기입니다. 암에 걸린 아내를 위해 남편이 음식을 해주는 내용이기 때문이죠. 실제 이야기의 주인공, 작가 강창래와 그의 아내는 30년간 부부였고 친구로 지낸 시간까지 합치면 40년을 알고 지냈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멀어지던 때도 있었다고 해요. 그럼에도 대장암 말기.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아내가 손을 뻗은 사람은 남편이었습니다.
당신이 날 돌봐주면 좋겠어.
라면밖에 끓일 줄 몰랐던 남편이 요리를 하기 시작합니다. 아내는 남편이 만든 음식만 겨우 넘길 수 있었기 때문에. 유기농 재료와 몸에 좋다는 것만 넣어 육수를 끓이고, 과일을 집어들 때마다 혈당 지수와 효능을 검색하고, 소금과 설탕 없이도 맛을 내려고 애쓰는 과정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 사랑일까?'
그런 노력에도 아내는 점점 죽음에 가까워집니다. 죽어가는 과정도 삶이기에 남편은 먹고 싶다는 건 뭐든지 만들어 주려고 하죠. 먹는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뜻이니까. 조금이라도 더 살려두고 싶어서. 작은 배 한 조각이라도 묽은 과일 주스 한잔이라도 정성껏 담아줍니다.
'작고 예쁜 유리병 세 개'
그 글자들 사이로 아내의 얼굴이 겹친다. 망고 주스를 마실 때 눈가를 스쳐 지나가던 순간적인 희열과 반짝임...... 얼마 만인가. 고개를 들고 애기처럼 웃었다. 바로 이 맛이야. 살 것 같아.
이 기억도 세월과 함께 바래겠지. 지금 이 아픔과 함께.
책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p.197
작가는 요리하는 감각을 기록해두고 싶어서 짤막한 글을 페이스북에 쓰기 시작했습니다. 담백하고 절제된 언어 속에서도 읽는 사람들은 슬픔과 사랑을 읽어냅니다. 진실한 이야기는 힘이 있습니다. 읽고, 듣고, 보는 사람들의 감정을 흔들고 깊이 몰입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책으로 묶은 이야기와 드라마로 재구성한 이야기 모두 전달력이 좋습니다. 원하시는 매체로 선택해서 음미해 보시길 바랍니다.
드라마는 왓챠 오리지널로 제작되었습니다. 주연은 한석규와 김서형이 맡아서 절제되고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줍니다. 한석규의 잔잔한 목소리로 레시피를 읊어주는 내레이션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 줍니다. 김서형의 강단 있으면서 여윈 외모는 암환자라는 역할에 더 몰입하게 만들어요. 두 배우의 연기력과 합이 작품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두 개의 기둥처럼 느껴집니다.
눈과 귀에 동시에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영상이란 점도 드라마의 강점입니다. 음식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보여주고 에세이에서 드문드문 빠진 설명들을 채워줍니다. 실제 설정이나 사건의 순서와는 조금 달라진 것은 3년간의 투병기를 12화 분량으로 압축하기 위해서 필요했을 겁니다.
남편, 아내, 아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함께 밥을 먹는 관계. 식구(食口)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장면들이죠. 재료를 준비하고 음식을 조리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정성과 정갈한 담음새도 드라마의 장점입니다. 이런 연출은 김민지 푸드 스타일리스트의 역할입니다. 가정집에서 쓸 것 같은 무늬 없는 식기세트와 희여멀건한 환자식이라도 맛있어 보이게 담으려고 노력한 거죠.
눈물이 필요한 날, 12편을 몰아서 보시기를 추천해요. 아침 일찍 보기 시작하면 저녁쯤엔 펑펑 울어서 얼굴이 부을 테니, 다음날도 쉴 수 있는 휴일에 적당하겠네요. 저는 드라마를 보고 도서관에서 바로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 읽었습니다.
책을 펼치면 17페이지에 아내가 남긴 유언 같은 문장이 있습니다. 그다음 페이지에는 담백한 삽화가 하나 나와요. 나란히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는 부부의 뒷모습을 그렸는데, 아내는 왼쪽 페이지에 남편은 오른쪽 페이지에 그려져 있어요. 여백이 많은 책 한 바닥의 그림을 보다가 눈물이 차오릅니다. 책을 묶어 놓아 생긴 그림자가 이승과 저승의 경계 같이 느껴져서요.
오래 고아낸 곰탕 국물을 후루룩 들이켜듯 책을 읽었습니다. 204 페이지쯤 되었을 때 다시 삽화가 나왔어요. 아내가 있던 자리는 빈 의자만 남았고 남편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서있는 뒷모습. 말로 다 할 수 없는 슬픔을 그림으로 전해서 감정이 흔들립니다.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는 가족과 사랑, 죽음에 대한 깊은 울림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쉽게 읽히지만 가볍지 않고, 문장은 간결하지만 감정은 깊습니다. 책을 보고 좋아하는 문장들을 옮겨 놓았어요. 독자분들도 한번은 꼭 책 전체를 읽어 보시면 좋겠어요.
좋아하는 문장들
평생 글을 써왔지만 내 삶의 한 부분을 이렇게 영원히 살려두고 싶었던 적이 없다.
사랑과 정성이 깃든 음식이라야 배부르다.
오이나물만으로 아침 먹겠나 싶어서 좋아하는 콩나물국을 끓였어. 버섯나물도 했고. 식탁에 차려둔 것들 가운데 콩나물국만 전자레인지에 넣어 일 분만 데우면 돼. 혼자라도 아침 잘 챙겨 먹어. 맛있게. 약도 잊지 말고.
'작고 예쁜 유리병 세 개' 그 글자들 사이로 아내의 얼굴이 겹친다. 망고 주스를 마실 때 눈가를 스쳐 지나가던 순간적인 희열과 반짝임...... 얼마 만인가. 고개를 들고 애기처럼 웃었다. 바로 이 맛이야. 살 것 같아. 이 기억도 세월과 함께 바래겠지. 지금 이 아픔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과 절벽을 느끼는 순간 슬픔의 둑이 터지면서 물이 콸콸 쏟아지는구나.
사람은 모두 한 개의 섬이고 그 사이를 오가는 배가 있다. 연락선이 수시로 떠나긴 하지만 부탁한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는 경우가 드물다. 세월이 지나고 보면 아예 선착장에 그대로 버려진 것도 눈에 띈다. 서로의 사랑이 비껴 지나간 수십 년의 세월, 섭섭하고 미워서 화를 내고 떠나려 했던 이유가 그것이었다니.
몸에 새겨진 절실한 마음이 지워도 지워지지 않은 것이다. 요즘은 몸의 기억이 마음을 자극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싫어했던 산책을 이제는 몸이 원한다. 아침 일곱시면 잠은 깨는 이유도 비슷하다. 아내의 아침을 위해, 올빼미처럼 살던 평생의 습관을 바꾸었다. 절실했기 때문에 쉽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절절한 소망이 담긴 눈빛으로 말하던 아내 모습이 떠올랐다. 다시 한번만 더 해변을 걷고 싶어. 따뜻한 남해바다에서.
내려오는 계단에서 불타오르는 석양을 만났다.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가 떠나기 전에 저렇게 애절한 모습을 남기는가. 다 타고 재만 남을 때까지 꼼짝 않고 쳐다보았다. 절 건물에 불이 켜지고 종소리가 들릴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