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면(直面)
#15
기대와 걱정은 근본적으로 같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인 감정을 덧붙이면 기대.
부정적인 감정을 덧붙이면 걱정.
기대와 걱정은 눈앞의 현실이 아닌 미래의 가능성에 가질 수 있는 감정이다.
현실은 늘 우리의 기대보다는 실망스럽고
우리의 걱정보다는 평온하기 마련이다.
진숙이의 유선종양을 수술하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기대와 걱정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수술로 진숙이의 건강이 회복되고 수명이 연장될 것이라는 기대.
수술로 진숙이의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져서 떠나보낼 수 있다는 걱정.
그럼에도 가능성이란 희망이 수술을 결정하게 했다.
조금 더 오랫동안 진숙이를 살려두고 싶은 마음이 눈앞의 현실을 왜곡했을 것이다.
희망이란 좀 더 간절한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니까.
#16
하얀 가운, 선해 보이는 인상, 안경과 손질하지 않은 머리스타일.
수의사는 학창 시절에 조용하고 선생님의 신뢰를 받았던 모범생같이 생겼다. 그는 꼼꼼하고 다정한 손길로 진숙이의 피를 뽑고, 신중하게 초음파 검사를 해서 유선종양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후 수술에 대해서 차분히 설명해 주었고 가족들과 함께 상의해 결정하라는 조언을 주었다.
상냥한 사람.
수의사는 이런 사람이었다.
"가족들과 잘 상의해서 진숙이를 수술하는 것으로 결정했어요."
결연한 내 말에 수의사는 잠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음... 보호자님. 제가 보여드릴 게 있어요. 근데 사진이 좀 잔인할 수 있거든요. 놀라지 마시고 같이 보면서 설명해 드릴게요."
수의사는 고양이의 유선종양을 수술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자료를 보여주었다.
손톱만 한 크기의 종양을 도려내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몸통의 가죽을 손바닥 크기만큼 잘라내는 큰 수술이었다.
잘라낸 만큼 줄어든 살가죽을 붙이기 위해 남은 살가죽을 끌어와 고정한다고 했다.
돈가스용 고기를 옆으로 늘릴 때처럼 피부에 칼집을 군데군데 넣고 봉합해 놓은 사진이 보였다.
그럼에도 피부가 충분히 늘어나지 않아 마치 복대를 찬 것처럼 몸통을 조이게 된다고 했다.
수술 후에 회복도 어렵지만 호흡곤란이나 합병증으로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우리 진숙이는 이 수술을 견디지 못하겠구나.'
침묵 속에 현실을 마주했다.
#17
"만약에 수술을 안 하게 되면 진숙이는 어떻게 되나요?"
"고양이의 유선종양은 80%의 확률로 악성입니다."
"악성이라고 하면 전이가 된다는 거죠?"
"네, 주로 폐에 전이돼서 호흡이 힘들어질 수 있어요."
"그러면 그때는 손 쓸 방법이 없나요?"
"그렇... 죠."
"그러면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나요?"
"보통은 진단 이후로 8개월 정도를 예상합니다."
"8개월......"
"......"
"1년도 안 남았네요......"
"......"
"1년도, 안 남았구나."
회복될 거란 기대도, 잘못될 거란 걱정도
결국 현실을 마주하지 못하고
가능성의 세계로 도망친 것에 불과했다.
내가 직면해야 했던 것은
나의 고양이는 죽는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상냥한 수의사는 한 움큼의 휴지를 내 손에 쥐여주었다.
그 손길이 다정하고 익숙하여 눈물을 흘리는 보호자를 여러번 위로해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