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
#12
"아빠가 만약 80살쯤 되었는데 배에 종양이 생겼어. 암인지 확인 해보려면 개복 수술을 해야 한대. 그럼 아빠는 수술할 거야?"
"안 한다."
"생각도 안 해볼 거야?"
"배를 여는 순간부터 약해지는 거야. 80살쯤 살았으면 충분히 살았다. 수명대로 살다 갈란다."
진숙이의 상황을 빗대어 물었으나 아버지의 대답은 완고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해 온 사람처럼.
아버지의 아버지, 즉 나의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15살일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어린시절 이야기는 좀처럼 꺼내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전혀 모른다.
다만 할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 마지막 몇년은 병상에 누워 계셨고 그로인해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는 것만 어림짐작할 뿐이다. 아,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아버지를 특별히 아꼈다는 것은 명절날 할머니로부터 전해 들었다. 할아버지께선 골목대장 둘째 아들을 예뻐하셨다.
할아버지의 투병과 죽음은 아버지의 유년기를 할퀴어 놓은 듯 했다.
#13
아버지와의 짧은 대화 후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생도 못지 않게 진숙이를 예뻐했으니 진숙이의 병에 대해 알아야 했다. 한편으론 어려운 결정의 무게를 나누어 주길 바랐다. 그러나 동생은 묵묵히 이야기를 들은 뒤 이렇게 말했다.
"진숙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누나니까, 수술에 대한 것도 누나가 결정하는 게 맞을 거야. 누나가 어떤 결정을 하든 존중할게."
누가 나를 가장 좋아한다는 것으로 내가 그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걸까?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 그에게 가장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근거가 되는 걸까?
동생의 말대로 진숙이가 가장 좋아한 사람은 나였다.
나를 가장 많이 찾고 나와 가장 오래 시간을 보냈다.
그렇다고 내가 진숙이의 남은 삶을 결정지어도 되는걸까?
머릿속엔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들이 떠올랐고 이내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옆에서 몸을 웅크리고 잠든 진숙이의 작은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털에 코를 묻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아직 잃고 싶지 않은 것. 간절하게.
#14
엄마는 나의 등대같은 사람이다. 아무리 혼란스러운 때라도 내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고 언제나 돌아갈 곳이 되어주는 사람. 엄마가 없었다면 내 인생이 얼마나 공허해 졌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언젠가 엄마가 진숙이와 함께 창밖을 보는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에 제목을 붙였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두 여자]
진숙이는 엄마에게 막내딸과 같았다.
‘진숙이에게 치명적이지도 모를 수술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엄마가 망설임없이 답했다.
"수술해야지."
아, 역시 엄마의 답은 늘 명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