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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조각 Nov 19. 2023

흰 침대보, 흰 욕조, 흰 책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혼자 좋은 호텔방에서 푹 쉴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TV도 켜기 싫고 조용하게 이 호사를 누리고 싶었다. 중고서점에서 책을 한 권 샀다. 소설가 한강의 '흰'이란 작품이었다. '이 책은 절판되어 1권밖에 남지 않았다'는 문장이 신상 구두나 한정판 가방처럼 설레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신상 구두에 설레어 본 적도 한정판 가방을 사고 싶어 동동거린 적도 없다. 사실 어떤 물건을 갖고 싶어 출시일만 손꼽아 기다리거나 한정판 수량에 맞춰 줄을 서본 일이 없다.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에서는 늘 심드렁하여 살아가는 일이 흥미롭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2인용 침대에 대각선으로 길게 드러누워 흰색의 책표지를 가만 쓸어보았다. 분명 중고서점에서 산 책인데 누군가의 손때 하나 묻지 않고 깨끗했다. 전 주인은 꽤나 깔끔한 성격이었던 것 같다. 거의 새 책에 가까운 책을 중고서점에서 발견한 것도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흰 호텔 침대 시트 위에 소설책을 올려두고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차분한 만족감을 기록하기 위해서.

    흰색 욕조에 뜨거운 물을 잔뜩 받았다. 따뜻한 물속에서 책을 읽기. 어쩐지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책 한 권의 절반쯤을 읽도록 물속에 잠겨 있었다. 책은 겨울 공기가 묻어서 서늘하게 버석거렸지만 허리 아래는 따뜻하고 물기 있는 채로. 이렇게 몸과 마음이 편안했다면 누군가를 조금 더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소설은 독특한 전개를 가졌다. [흰] 것들을 떠올리며 단어들을 써 내려가고, 그 단어로 파생되는 짤막한 글토막이 연결되어 하나의 사건을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문, 강보, 배내옷, 달떡, 안개, 젖, 성에, 서리, 눈, 눈송이들, 만년설, 진눈깨비, 흰 개, 눈보라, 재, 소금, 입김, 하얗게 웃는다, 백목력, 각설탕...


    온갖 흰 것들의 나열 속에서 유독 [입김]이란 글이 마음에 들었다.

어느 추워진 아침 입술에서 처음으로 흰 입김이 새어 나오고,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 우리 몸이 따뜻하다는 증거. 차가운 공기가 캄캄한 허파 속으로 밀려들어와, 체온으로 덮여져 하얀 날숨이 된다.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

한강이란 작가의 문장은 시를 닮았다. 소설이나 수필 같은 긴 글에서도 문장 하나하나는 시를 닮아 소리 내어 읽어보게 하는 매력이 있다. 겨울에 입김을 볼 때마다 떠오를 표현이 될 것이다. '우리 생명의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


    몸에 물기를 닦고 로션과 오일을 꼼꼼히 바르고 젖은 머리를 대강 말리고는 침대에 엎드렸다. 욕조의 수증기가 퍼져 방이 제법 따뜻하고 촉촉했다. 덩달아 몸의 체온도 오르는 듯하여 두툼하고 서늘한 침대 위에서 몸을 식혔다. 채도 낮은 네이비 색의 침대 헤드, 짙은 밤색의 바닥 재질. 그동안 지나온 어떤 방보다 이 방이 제일 마음에 든다. 나중에 내 집을 사게 된다면 이런 아늑한 침실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좀처럼 생기지 않던 소유욕이 순식간에 자라난다. 언젠가는 반드시 손에 넣을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진실이나 사랑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열망하기보다, 눈에 보이고 손에 쥘 수 있는 것을 열망하는 일이 훨씬 더 가능성 있는 일로 느껴진다.


    책을 마저 읽고 어쩐지 이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날씨는 춥고 방 안은 따뜻한데 소설 속 이야기는 처연하여 지난겨울 어느 날의 감정이 떠올랐다. 사랑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아니었던 날들. 여러 번의 실망과 배신감들. 사랑이 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해 안타까운 것과 애초에 사랑이 아닌 것의 괴리감.


    "나보다 더 좋은 남자를 만나길 바라."

    이 말의 의미가 사랑일 수 있을까. 그는 꼭 덧붙이길, '친구로 지내자'라고 했다. 그것이 본인의 불편한 감정을 덜어내려는 위선 같아서 거북했다.


    "넌 친구로도 별로야."

    내가 쏘아붙일 때면 그는 내 말버릇을 타박했다.


    뜨겁게 사랑했던 만큼 강렬히 미워하게 되는 감정을 그는 평생 모를 것이다. 마침내 나의 입에서 나온 '친구로 지내자'는 말이 어떠한 기대도 애정도 없이 완벽한 이별을 고하는 의미라는 것도 그는 평생 모르겠지.


    그러니까, 그런 때가 있었다. 이별도 여러 번 반복하면 무뎌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에 큰 기대를 하지 않게 된다. 왔다가 가는 것. 가끔 무료한 내 인생에 특별한 드라마를 선물해 주는 것. 지나고 남은 자리가 어떤 물기 어린 상념을 남기는 것.


    깊이 잠들고 저절로 눈이 떠진 아침, 반투명한 커튼 사이로 빛이 스며 나오는 것을 보았다. 다음에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면 이곳에 와야겠다고 생각하다, 곧 그런 사람이 생기지 않으면 혼자서라도 이 방에 다시 오겠다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언젠가부터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보다 나를 사랑하는 일에 더 귀하게 느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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