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에세이] 노태우 전 대통령 서거, 그리고 떠오른 기억
『1988년, 섬마을 허름한 집. 안방 겸 거실에는 부부와 5살 사내아이, 이웃 아저씨 한 명이 앉아 있다. 안방 한쪽 벽면에는 제13대 대통령 후보 포스터 한 장이 붙어 있다. 부부는 포스터를 가리키며 저 사람이 누구냐고 사내아이에게 묻는다. 아이는 “노때우, 노때우”라고 외친다. 그 모습을 본 부부와 아저씨는 깔깔 웃는다. 또 엄마는 “노태우가 누구야?”라고 묻는다. “대똥령”이라고 아이는 답한다. 엄마는 아이에게 “나중에 뭐가 될 거야?”라고 재차 묻는다. 아이는 “대똥령, 대똥령”이라고 외친다. 어른들의 웃음소리가 바닷가까지 퍼져 나간다. 파도도 까르르 웃는다.』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021년 10월 21일 서거했다. 향년 89세이다. 이날 국내 포털 메인 창에 속보로 뜬 그의 부고 소식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노태우, 그는 내 인생의 첫 대통령이다. 어릴 적 우리 집 안방 벽에는 제13대 대통령 후보 기호 1번 노 전 대통령의 포스터가 붙여져 있었다. 파란색 바탕 포스터 속에서 노 전 대통령이 오른쪽 손 엄지를 치켜세우며 웃고 있었다. ‘이제는 안정입니다’라는 노란색 카피가 그의 머리 위에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집에 노태우 전 대통령 포스터가 붙여져 있었던 이유를 여전히 모르겠다. 아마도 벽지가 뜯어진 벽면을 메우기 위해 부모님 중 한 분이 붙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언제부터 노 전 대통령의 선거 포스터가 안방에 붙여져 있었을까. 아마도 1988년 대통령 선거가 지난 후였을 것 같다. 아니면, 그 당시에는 대통령 후보 포스터도 선거 용지와 함께 각 가정에 보낸 것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해봤다. 요즘 선거 전에 모든 유권자에게 후보의 인물 사진 등을 보낸 것처럼 말이다. 여하튼 그 포스터가 어떻게 집에 와서 붙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2021년 현재 선거 벽보를 훼손하거나 철거하는 자는 공직선거법 제240조 규정에 의해 2년 이하의 징역, 4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게 된다.)
내가 한 아이의 부모가 되자, 어릴 적 내가 노태우 포스터를 보고 “노태우, 노태우”라고 말한 모습을 보고 부모님이 즐겁게 웃었는지 알게 됐다. 글자도 모르는 5살짜리 아이가 ‘노태우 대통령’을 기억한다는 게 부모님 입장에서는 신기했을 것이다. 그때 나는 부모님이 왜 웃는지 어리둥절했을 뿐이었다. (나는 4살 때부터 기억한다.) 그런데 백일도 되지 않는 내 아이가 옹알이를 하거나 멍한 표정을 할 때 나는 그때 부모님처럼 깔깔 웃는다. 이런 나를 보고 아내는 무엇이 좋냐며 같이 웃는다. 이렇듯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내 추억은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었다.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는 군인 출신 정치인이다. 제4공화국 당시 전두환과 함께 군 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했고, 12.12 군사반란을 주도했다. 전두환이 집권한 뒤 정치인으로 전향했다. 특히 제6공화국 출범 이래 직선제로 선출된 최초의 대통령이다. 1995년 대통령 퇴임 후 내란 혐의로 전두환과 함께 구속됐다.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의 반란수괴 등에 관한 판결로 징역 17년과 추징금 2,688억 원 형을 선고받았다. 헌정사상 첫 번째로 구속된 대통령이 됐으나 같은 해 12월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사면됐다. 그가 남긴 최대 유행어(?)는 "나 이 사람 (보통 사람) 믿어주세요"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나 이 사람 믿어주세요”라고 외쳤지만, 국민의 믿음을 배신한 대통령이 됐다. 1995년 검찰의 수사 결과,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수수가 드러났다. 이에 노 전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재임 중 기업체로부터 5,000억 원가량 받아 사용하고 1,700억 원가량이 남았다’고 밝혔다. 그의 집안 곳곳에서는 현금 뭉치가 나오기도 했다. 당시 뉴스를 통해 그 장면은 전국적으로 방송을 타 국민의 공분을 샀다. 집 좌변기에서도 현금 뭉치가 나왔다고 전해졌다. 이때 노태우 좌변기 저금통이 출시돼 인기를 끌었다. 심지어 그의 별명이 ‘물태우’에서 ‘돈태우’가 됐다.
대한민국 사상 첫 직선제로 대통령이 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리는 내게 큰 실망감을 안겼다. 그전까지 내 꿈 중 하나가 ‘대통령’이었다면, 그 사건 이후 대통령이라는 위치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됐다. 처음으로 국민이 선택한 대통령이었지만 그도 욕심 앞에서 무릎 꿇는 보잘것없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역사에 남을 대통령이 됐음에도 말이다. 도대체 그는 어떤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었을까.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리기 전까지 노 대통령은 내게, 그리고 국민에게 오래전에 잊힌 대통령이었다. 역대 대통령 서거 소식에 애도를 표했지만, 노태우 대통령에게는 잊어버렸던 내 추억을 동봉해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