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하지만 빌런 초 초범입니다.

나의 선의가 무임승차라고

by Contexter 혀

빌런 초 초범

"넌 한 번도 사과를 한 적이 없어. 내가 기분 나빠하면 그제야 너는 네 의도는 그럴 맘이 없었다는 변명만 늘어놓지. 난 너의 그 잘난 의도 말고, 미안해 한 마디가 듣고 싶어."


상처받은 이에서 '오해받은 나'로 뒤바뀐 누군가의 토로이다. 살면서 나는 이 말의 청자였을까, 화자였을까. 아니면 나와는 아예 상관없는, 일어나지 않은 일인가. 만약 후자라고 확신한다면, 잠시 다음의 장면들을 복기해 보자.


보통 '빌런'이라고 하면 뉴스에 나올 법한 무례한 이들을 떠올린다. 식당 직원의 실수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갑질 고객, 예약 후 예고 없이 나타나지 않는 노쇼(No-Show)족, 혹은 타인의 통로를 가로막는 무개념 주차 빌런 같은 이들 말이다. 이들은 사회적 약속을 대놓고 비웃기에, 우리는 거리낌 없이 손가락질하며 정의로운 분노의 공감대를 형성하곤 한다. 공공장소에서 스피커폰으로 통화하며 소음을 내뿜는 이를 마주할 때, '적어도 나는 저렇게 살지는 않는다'는 도덕적 우월감은 뇌를 거치기도 전에 안도감으로 몸을 감싼다.


그러나 시선의 해상도를 조금만 높여보면 달라진다.

상대의 약점을 솔직함이라는 무기로 찌르며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라고 덧붙이는 조언자, 교묘한 자기 비하를 통해 타인의 칭찬과 에너지를 갈취하는 결핍자, 선행조차 SNS에 전시하며 칭송받는 자신에게 몰두하는 미담 제조기. 이들은 겉보기에 정중하고 다정하지만, 그 이면에는 타인의 반응을 통해 자신의 지배력을 확인하려는 욕구가 도사리고 있다. 일상의 미세한 틈새로 좁혀보면 상황은 더 묘해진다. 거기엔 '선의'라는 가면을 쓴 교묘한 침범자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적어도 저 정도는 아니라고, 나는 관찰자 혹은 목격자일 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엄마를 위한 조언을 나누던 동생과의 대화 중, 그 견고한 확신에 균열이 갔다.


"누나, 내가 시작한 이야기인데 어느새 누나가 주인공이 되어 있어. 내 노력에 무임승차하지 마."


순간 벌겋게 달궈진 쇠구슬 한 알을 목구멍으로 꿀꺽 삼킨 듯했다. 내 딴에는 동생의 말에 격하게 동조하며 내 경험을 보태려던 것이었다. 하지만 동생의 눈에 비친 나는, 동생이 정성껏 마련한 대화의 장에 숟가락 하나 얹고 나타나 주인 행세를 하는 불청객일 뿐이었다.


뒷덜미부터 뜨거운 열기가 타고 올라왔다. 가슴 깊은 곳에서 "나는 그렇지 않아!"라는 고함이 터져 나왔지만, 애써 부정할수록 목 뒤는 더 화끈거렸다. 사실 나는 아직도 부정 중인지 모른다. 정확히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흐릿하지만, 그 흐릿함을 뚫고 나를 찔렀던 뜨거운 감각만은 선명하다. 상대의 이야기에 공감했을 뿐이라는 내 안의 합리화가 타인의 감정 노동에 숟가락만 얹는 '무임승차'였다는 사실을, 나는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사회학자 찰스 더버(Charles Derber)는 대화 중 주의 집중을 얻으려는 심리를 '대화적 나르시시즘(Conversational Narcissism)'으로 정의했다. 그는 화제를 상대에게 머물게 하는 '지지 반응(Support-Response)'과 화제를 자신에게로 돌리는 '전환 반응(Shift-Response)'을 구분한다.


동생: "나 오늘 정말 힘든 일이 있었어."
지지 반응: "무슨 일이었는데? 정말 힘들었겠다." (초점이 동생에게 머묾)
전환 반응: "나도 그런데. 나는 어제 진짜 죽는 줄 알았어." (초점이 나에게로 전환됨)


나는 나의 전환 반응을 '동조'라고 믿었지만, 동생에게 그것은 명백한 '주의 집중 탈취'였다. 자신의 유사한 경험을 공유해 상대가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선의가, 실제로는 상대의 경험을 축소하고 소외감을 유발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뇌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의도된 악의라기보다 '뇌의 효율성 전략'이 불러온 일에 가깝다. 인간의 뇌는 타인을 통제하거나 우월함을 느낄 때 강렬한 도파민을 분출하는 보상 시스템을 갖고 있다. 특히 편도체(Amygdala)는 0.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상대와의 서열을 스캔한다. 동생과의 대화에서 내가 서둘러 내 서사를 얹은 것은, 어쩌면 '내가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해 안심하고 싶어 했던 비겁한 생존 본능이었을지도 모른다.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인간의 사고를 자동적이고 직관적인 '시스템 1'과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시스템 2'로 구분한다.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말들은 대부분 노력이 들지 않는 시스템 1의 작품이다. 반면 타인의 입장을 고려해 어휘를 고르는 고도의 인지 활동은 에너지를 많이 소모한다.


아마 그날의 나는 피곤했거나, 혹은 가족이라는 안전망을 믿고 방심했을 것이다. 내 무의식은 '동생이니까 나보다 서열이 낮고 안전하다'라고 판단해 대화에 고도의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결론 내렸던 것이다. 시스템 2가 에너지를 절약하려 잠시 운전대를 놓고 휴식하는 사이, '빠른 뇌'인 시스템 1이 도파민이라는 달콤한 보상을 쫓아 동생의 공간에 무단 침입해 버린 셈이다.


결국 나의 '의도 없는 실례'는 뇌의 인지적 제어 속도가 본능적 반응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인지적 시차'의 결과물이었다. 이 지점에서 나는 다시 한번 화끈거리는 뒷덜미를 만졌다. 언제든 내 뇌는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 가장 편안하고 만만한 타인의 목소리부터 지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쯤 되면 누군가는 한숨 섞인 질문을 던질지 모르겠다. 사람 하나 대하는 데 뇌과학까지 동원하며 매번 뒷덜미의 온도를 체크해야 하느냐고, 그렇게 사는 건 너무 피곤하지 않냐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참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좀 피곤한데?'라고 느끼고 있다면, 당신은 되려 안심해도 좋다. 그 피곤함이야말로 당신이 타인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진짜 빌런은 피곤하지 않다. 그들은 자신이 타인의 목소리에 무임승차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아주 쾌적하고 당당하게 대화의 주인공이 된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단순히 빌런을 조심하자는 경고는 아니다. 우리 사회는 예전과 달리 아주 미세한 결을 살피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사회가 정교해지는 만큼, 우리도 자신의 행동을 더 미세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미세하지 못한 사람을 만나 단절의 벽을 높이고 혐오를 키우는 대신, 나부터 미세한 사람이 되어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니 나는 기꺼이 이 피곤함을 선택하기로 했다. 사랑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기꺼이 '무임승차'가 아닌 '지지'를 보내기 위해 뒷덜미의 온도를 체크하는 일. 나의 성찰은 이제 겨우 이 뜨거운 이 뒷덜미의 온도를 체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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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천법 (Action Plan)

: 누군가 고민이나 경험을 이야기할 때, 내 머릿속에 "나도 예전에 그랬는데"라며 나의 경험을 꺼내려는 충동(단기 도파민 추구)이 들면 마음속으로 '3초 정지(Pause)' 버튼을 누른다. 그 후, 반응의 형태를 의도적으로 변환하여 다음과 같은 지지적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넌 어떻게 대처했어?", "그때 어떤 감정이 들었어?",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좋을까?".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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