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추위에 얼어 죽지 않기 위한, 나만의 생존자 선언
우리의 뇌는 상상만으로도 우리를 죽일 수 있다.
1950년대, 영국의 한 화물선. 묵직한 철문이 닫히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한 선원이 냉동 컨테이너 안에 홀로 갇혔다. 사방을 둘러싼 차가운 철벽 앞에서 그는 죽음을 직감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손끝의 감각이 무뎌지고,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에 몸이 서서히 굳어갔다. 그는 얼어붙은 손을 간신히 움직여 벽면에 자신의 마지막 순간들을 기록했다. 숨이 얼마나 가빠오는지, 살갗이 어떻게 얼어붙고 있는지, 생명이 어떻게 사그라들고 있는지. 결국 그는 차가운 바닥에 웅크린 채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를 발견한 사람들이 마주한 진실은 기괴했다. 컨테이너의 냉동 장치는 애초에 꺼져 있었고, 내부 온도는 영상 19도였다. 그를 죽인 것은 물리적인 추위가 아니었다. '나는 냉동고에 갇혔고, 곧 얼어 죽을 것이다'라는 뇌의 완벽한 착각, 그 서늘한 확신이 스스로의 심장을 멈추게 한 것이다.
반면, 이와는 정반대의 기적도 존재한다. 인적이 끊긴 미국의 한 외딴곳, 흉악범에게 두 팔을 잃은 여성이 버려졌다. 잘려 나간 손목 동맥, 쏟아지는 피. 의학적으로 보자면 그녀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뇌를 완벽하게 속이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자신이 피와 살로 이루어진 연약한 인간이 아니라, 당시 유행하던 TV 드라마 속 '무적의 사이보그'라고 상상했다. '나는 기계다. 기계는 고통을 느끼지 않으며, 피를 흘리지도 않는다.' 그 강렬한 자기 암시가 시작된 순간, 놀랍게도 그녀의 신체는 지혈 시스템을 가동해 출혈을 멈추었다. 그녀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덤덤히 먼 거리를 걸어와 스스로의 목숨을 구원했다.
인간은 상상을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하고,
고통의 감각마저 마비시키며 살아남을 수 있다.
이런 믿음의 힘은 현대 의학의 정점에서도 증명된다. <뉴욕타임스>에 보도된 텍사스 의료팀의 '가짜 무릎 수술' 사례가 그렇다. 뇌가 치유되었다고 믿는 순간, 통증의 신경을 스스로 재배치한 환자들은 실제 수술을 받은 이들과 똑같이 고통 없는 일상을 누렸다. 4,000개의 빵을 먹으면 암이 나을 거라는 기이한 집념 하나로 암세포를 소멸시킨 어느 환자의 기록 역시 같은 궤를 달린다. 그들에게 그것은 생존을 향한 가장 처절하고도 정중한 최면, 즉 ‘플라세보(Placebo)’였다.
맹목적인 믿음과 긍정적인 기대가 현실의 기적을 만든다.
이 이야기들은 섬뜩하고도 경이로운 하나의 진실을 가리킨다. 인간의 생사를 결정짓는 것은 눈앞의 물리적 현실이 아니라, 그 현실을 해석하는 '뇌의 믿음'이라는 사실이다.
혹시 여기까지 읽으며 너무 강렬한 이야기들에 "에이, 말도 안 돼"라고 고개를 젓고 있지는 않은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사이엔 벽이 생기고, 안과 밖이 나뉜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을 '된다'와 '안 된다'라는 이분법으로만 뒤집지 말고, 그 사이의 '정도'로 바라보면 어떨까. 1부터 10까지의 눈금 중 10이 완전한 기적이라면, 우리는 적어도 1에서 2 정도는 조절할 수 있지 않은가. 거창한 변화가 아니어도 좋다. 내 마음의 렌즈를 아주 조금 조절하는 것, 그 작은 시도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어제보다 조금 더 편안해질 수 있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바로 그 '미세하고 처절한 조절'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매일같이 크고 작은 냉동 컨테이너의 철문이 닫힌다. 나와는 세계관이 너무도 다른 타인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부대껴야 하는 벅참, 타인의 무딘 말 한마디가 날카로운 흉기가 되어 마음을 베어내는 순간, 그리고 나 자신조차 한없이 하찮게 느껴지는 숱한 밤들.
나 역시 한때는 잘못된 믿음(노시보)에 갇혀, 그 서늘한 가짜 추위 속에서 스스로를 무색무취의 낡은 껍질 안에 가둔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무수한 일상의 마찰열 속에서 나를 지켜내기 위해 나는 기어이 선택해야만 했다. 꺼진 냉동고 안에서 두려움에 떨며 얼어 죽는 선원이 될 것인가, 아니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도 스스로 피를 멈추며 걸어 나오는 생존자가 될 것인가.
나는 후자를 택했다. 이 공간, 'coctexter_혀'는 바로 그 치유와 생존의 기록이다. 나는 이곳에서 나의 결점들을 들추고, 미처 살피지 못했던 마음의 신경(Nerve)들을 하나씩 살살 당겨본다(tug). 아프고 불편했던 기억마저 내가 좋아하는 것, 나를 성장시키는 가치로 맥락(Context)을 바꾸는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내 안의 얼어붙은 뇌를 녹이고, 상처의 깨진 틈을 금가루로 이어 붙이기 위해서.
누군가는 내 글을 보며 왜 항상 억지스러울 만큼 '꽉 닫힌 긍정의 결말'을 고집하냐고 묻는다. 이유는 명확하다. 그것이 나를 살리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나의 이 긍정은 어쩌면 울음에 가까운 생존 본능일지도 모른다. 나는 상처 입은 채 주저앉는 대신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생존자가 되기 위해, 매주 한 편의 글이라는 4,000개의 빵(플라세보)을 굽는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이 치열한 기록 끝에, 언젠가 내가 뇌과학의 논리 없이도 충분히 안전하다고 느끼는 날이 올 것임을. 그때가 되면 나는 생존을 위한 투쟁 대신, 내 발끝을 스치는 바람의 감촉과 코끝을 간지럽히는 라일락 향기만을 오롯이 묘사하는 글을 쓰고 싶다. 그 편안한 문장들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위해, 나는 오늘도 기꺼이 글의 결말을 긍정으로 닫는다.
나의 이 기록이 언젠가 세상 앞에 설 나의 아이들에게,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다정한 연결감이 되기를 바란다. 사실 이미 나는 혼자가 아니지 않은가. 내 안의 가장 든든한 경호원인 ‘뇌’가 늘 곁에서 말을 건네며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경호원에게도 어린 왕자가 여우를 길들이듯 세심한 조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함께 기록해 둔다.
가짜 추위에 무기력하게 얼어 죽지 않기 위해, 그리고 나와 내 곁의 사람들을 지켜낼 만큼 단단하고 다정한 생존자가 되기 위해 나는 오늘도 기꺼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