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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cgirl Sep 28. 2016

꿈은 꿈처럼 다가온다

프롤로그


스무 살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방랑벽은 내 청춘의 틈을 여행으로 촘촘히 채워놓았다. 새로운 세상, 그것은 언제나 내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맛보는 즐거움이 아닌, 여행이 일상이 되는 삶이 궁금해졌다. 


돌아갈 곳이 있지만 돌아갈 수 없는 이방인이 되고 싶었다. 길 위의 시간에 찌든 후에도 내 심장의 온도는 처음과 다르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조금은 더 거품을 걷어내고 세상을 바라보게 될까. 여행 뒤에 남을 그리움과 공허함이 두려웠지만, 그조차 지겨워져 미련조차 남지 않을지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여행 갈래? 좀 길게.”

“그래. 얼마나?”

“음, 1년 이상?”

“난 1년 이상은 힘들 것 같은데. 6개월에서 1년 정도면 괜찮을 듯?”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늘 그렇듯 담담한 두 사람은 담담하게 여행을 결정했다. 나에 비해 Y는 여행이 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증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지만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마음의 준비라도 해놓은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를 잘 아는 그는 여행이 너무 길어지면 힘에 부칠 것 같다며 일찌감치 선을 그었다.


“그래. 일단 가고 싶은 곳들 생각하면서 루트를 짜 보자. 근데 떠나보면 또 계속 바뀌겠지.”


언제나처럼 계획 없이 지르고 보는 나는 얼버무렸지만 가능한 길게 여행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맹세코 몰랐다. 지구 '한 바퀴'가'한 바퀴 반'이 되고 '대충 1년 정도'가 '스무 달'이 될 줄은.


두 사람 모두 가장 가보고 싶었던 남미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출발은 남미를 여행하기 좋은 계절, 그곳에 봄이 오는 이곳의 가을. 이후는 정해두지 않기로 했다. 다만 겨울을 피해 따뜻한 봄과 가을 사이를 여행하기. 역시나 그때는 몰랐다. 여행을 처음 시작했던 장소에서 이 여행을 마치게 될 것이라고는. 


하긴, 이 사람과 긴 여행을,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함께 걷게 되리라는 것도 언제는 알고 있었나. 돌아보면 한 치 앞도 알 수 없었던 이 여행은 우리의 삶 그 자체였고 가장 적나라한 삶의 기록이 되어있었다.






“가기 전에 결혼이나 하고 갈까?”


이십 대를 함께 보낸 7년의 연애기간. 긴 여행, 나의 꿈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보다 더 긴 인생을 함께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 한결같이 나를 지지해준 사람. 나만큼 여행을 즐기진 않지만 나보다 더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사람. 언제든 가장 효율적인 짐을 꾸릴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 (그래서 집에 두는 짐도 줄여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 말없이 함께 앉아 있어도 우주에서 가장 편안한 사람. 무엇보다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꼭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


여행을 먼저 정하고 결혼을 하기로 했으니 신혼여행은 아니라고 우겼다. 결혼식을 하고 여행을 떠난 것은 맞지만 출발 날짜에 맞춰 적당한 예식 날짜를 골랐을 뿐이었다. 그냥 이 여행을 무엇이라 규정짓는 것이, 독립적인 두 사람의 경험이 부부여행, 신혼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지는 것이 싫었다. 우리는 그저 여행자의 삶을 살아보는 것이었다. 


잠시 쉬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사는 게 일하는 것과 노는 것 딱 두 가지로 나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놀러 간다는 말을 부인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갈래의 길들 중에 이 길을 살아보고 싶었고 그래서 그냥 살아보러 간다고 말하곤 했다. 어느 길이든 가보지 않고는 그 끝은 알 수 없는 법. 어디로 이어질지, 막혀서 되돌아와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구라는 별에 태어났으니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숨 쉬고 걸을 권리를 마음껏 누리고 싶었다. 한 번뿐인 내 인생이니까. 





장기여행이라 준비할 것이 많을 것 같지만 여느 여행처럼 첫 여행지로의 항공권을 사두는 것 이외에는 딱히 해야 할 일이 없었다 (준비를 모르는 나라는 사람 때문에 막판에 짐을 싸느라 애를 먹었다고 Y는 불평을 했지만). 모든 것을 생략하니 결혼이란 것 또한 간단했다. 남미에 오래 머물 생각으로 스페인어를 조금씩 배웠고,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 찾아 푸르게 살자며 푸르른 공원에 나가 삼각대 놓고 청바지에 흰 티를 걸치고 우리만의 웨딩사진을 남겼다. 무더운 여름이 흘러갔다. 






진짜 고대하는 날들은 소리 없이 찾아와 버린다. 우리는 그저 삶이라는 같은 길 위를 하루하루 걷고 있을 뿐, 어제와 오늘의 경계는 보이지 않는다. 


떠나기 전날 밤, 결혼식 후에도 집이 없던 우리는 각자 부모님 집에서 짐을 싸고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각자의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내 방의 공기와 내 침대의 온기. 어쩐지 아직 누군가의 파트너보다 엄마, 아빠의 딸이 더 익숙한 그 기분이 묘하고 좋았다. 


꿈은 정말 꿈처럼 다가오는구나.


그렇게 언젠가부터 늘 입에 달고 살던 긴 여행, 지구 한 바퀴 삶이 시작되었다. 참 많이 웃고 울고 신나고 아프고 설레고 지루하고 황홀했던 우리의 젊은 날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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