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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cgirl Oct 14. 2016

D129. 세상에서 가장 높은 수도 라파스

Part1.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라틴 아메리카_볼리비아


만만치 않은 카니발


브라질의 리우 카니발 다음으로 남미에서 큰 볼리비아의 오루로 카니발이 한창이라더니 나라 전체가 축제로 들썩인다. 코파카바나에서 라파스까지는 버스로 서너 시간 남짓. 버스가 달리는 도로 위에서도, 잠시 내려 배로 갈아타는 호수가에서도, 곱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흥겹게 춤을 추고 있다. 덕분에 차는 꽉 막혀서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비좁은 버스 안이 훌륭한 축제 관람석이 된다.


라틴 아메리카를 여행하는 내내 크고 작은 축제를 만나며 인상 깊은 점은 젊은 사람, 나이 든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다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즐긴다는 것이다. 이들에게도 내가 모르는 시간의 갈등이 있겠지만 음악이 흐르는 순간만큼은 모두가 함께다.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 모여 술병을 들고 춤을 추는 모습이 이토록 신선한 걸 보면 나에게는 이런 경험이 없었던 것 같다.


"비가 오나? 다들 우비를 입고 있네?"


버스에서 내려 다시 배낭을 짊어지며 주변을 둘러보니 우비를 입은 사람들로 거리가 북적인다. 이 많은 인파를 뚫고 숙소를 찾을 생각에 벌써부터 어깨가 뻐근해져 오는데 비까지 맞을 생각을 하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여행을 하며 많은 것들이 익숙해졌다지만, 빗속 트레킹을 수도 없이 해보았다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예뻐지지가 않는 것이 빗속을 걷는 일이다. 


집보다 길을 택한 우리. 길 위의 시간을 살아내기 위한 이 배낭 하나까지도 버릴 수 있게 되면, 그때는 비를 더 사랑할 수 있을까. 언젠가 나는 빗속에서 춤을 춰보고 싶다고, 그래야겠다고 생각한다. 


"응? 비 안 오는데?"

"근데 왜 다들 우비를 입고 있지?"


왜일까 생각하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오는 차가운 물줄기! 


헉, 물총이다! 


실수로 쐈나 힐끔 쳐다봤는데 씨익- 하고 웃는다. 실수가 아니다. 이건 나를 겨냥한 것이다. 물총뿐만이 아니다. 듣도 보도 못한 거품 스프레이까지. 물을 쏘고 거품 스프레이로 아무에게나 무차별 공격을 하는 것이 이 동네에서 축제를 즐기는 방식인 것이다. 주말 내내 이어진다는 이놈의 카니발. 그 말인즉슨, 며칠이고 호스텔 밖으로 나가면 물폭탄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이다. 


더구나 우리에겐 우비가 없다. 


한산해 보이는 거리에서도 방심은 금물.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알 수 없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길에서 처음 본 사람에게 물총을 쏘고, 건물 위에서 물풍선을 던진다. 심지어 달리는 차 안에서 물을 뿌리고 도망간다. 갑자기 달리던 승합차가 앞에 멈추더니 문이 열리고 물총을 쏘는 장면, 상상이나 해보았는가.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진짜 총이나 납치해가는 장면이 아니라 다행이라 위로해야 하나. 


꼬마들은 얄밉게 내 옆의 덩치 큰 남자 어른에게는 쏘지도 못하면서 꼭 내 뒤에서, 그것도 엉덩이에 물을 뿌린다. 얼마나 급한지 나도 모르게 “하지 마!” 하고 한국말로 소리를 치고 있지만, 당연히 소용이 없다.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꼬마들 덕분에 금세 지쳐 숙소에 돌아와 창 밖으로 가장행렬을 구경하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예상치 못한 물줄기는 다른 곳에도 있다. 무차별 노상방뇨의 공격. 구석진 곳도 아닌 사람들 다니는 길 가에서, 벽이 아닌 길을 향해 노상방뇨를 하고 있는 아저씨들이 대낮부터 여기저기 보인다. 이 나라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것도 만만치 않겠다.




그래, 사진은 찍어줄테니 손에 든 그것만 던지지 말아다오.





 



산 프란시스꼬 광장




세상에서 가장 높은 수도


커다란 도로, 넓은 광장, 그리고 다시 어지러운 기념품 가게들을 지나면 춤추는 사람도 물을 쏘는 사람도 없는 좁은 골목이 이어진다. 모처럼 여유롭게 숨을 고르며 걷다가 골목 한편에서 작은 공방을 발견한다. 공방 문은 열어둔 채 그 앞에 앉아 고기를 구워 먹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 문 연 거야?" 

"응, 열었어."


아직도 이토록 짧은 스페인어라니 안타깝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긴 하다. 열었다는 말 한마디에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 한달음에 호스텔로 달려간다. 에콰도르 오타발로에서부터 매일 안고 다니다 너덜너덜해진 알파카 가방이 생각난 것이다. 모두가 비슷해 보이는 문양이지만 내가 가진 것과 같은 것은 본 적이 없어 다시 살 수도 없던 참이었다. 


가방을 내밀며 뜯어진 곳을 손으로 가리킨다. 이번에도 복잡한 대화는 필요 없다. 알겠다며 뚝딱하고 고쳐준다. 날아갈 듯 기쁘다. 기뻐하는 나의 얼굴을 보고는 그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진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것들을 참 많이도 가지고 있는 볼리비아는 수도조차 세상에서 가장 높다. 한 나라의 수도라 하기엔 참으로 작지만 그 어느 곳보다 크고 넓은 하늘이 펼쳐진 도시. 높은 도시를 감싼 구름은 포근하고 햇살은 더 순수하다. 남미를 여행하며 높은 것은 결코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란 걸 다시금 되새긴다. 조금은 거칠어진 호흡, 하지만 시원한 숨을 가슴에 담을 때마다 이 맑은 세상에 고마움을 느낀다. 고산을 떠나고 나면 무척이나 그리워질 이 청량한 공기.








La Paz는 영어로 Peace, 우리말로 평화라는 의미를 지닌다. 우리끼리 '미친 카니발'이라고 불렀던 날들이 한바탕 지나가고 나면 도시는 이름만큼이나 평화로울까. 먼 옛날, 전쟁과 싸움을 원하지 않았던 사람들, 힘없고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산으로 도망쳐왔다는 이야기를 떠올린다. 오직 평화를 바라며 걸었을 그들의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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