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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cgirl Oct 14. 2016

D135. 여행의 주말

Part1.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라틴 아메리카_볼리비아


우유니 가는 길에 잠시 들러볼 생각으로 왔던 수크레에서 좀처럼 떠나지를 못하고 있다. 라파스와 달리 조용한 마을에 정갈한 숙소가 마음에 쏙 들어버렸다.



 




하얀 도시 수크레




떠나온 지 5개월. 


우리가 지불할 수 있는 수준의 숙소에 기대하는 것은 많지 않다. 뜨거운 물만 잘 나와줘도 감사하고 춥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런데 널찍한 방에 책상도 있고 깨끗한 공동주방까지 있으니 금상첨화. 이렇게 둘만 있는 조용한 더블룸이, 편안하고 따뜻한 방이 얼마 만인지. 이제 볼리비아를 떠나면 이런 가격에 이런 숙소는 꿈도 꿀 수 없으니 잘 쉬어 가야 한다는 무의식의 압박이 발목을 붙잡고 있다.


조금만 걸어나가면 시장에 싱싱한 채소와 과일이 가득해서 한국에서도 안 해 먹던 밥 해 먹는 재미가 있다. 든든한 배를 두드리니 밀린 여행기부터 그동안 사용한 경비까지 보기 좋게 정리하고 싶어 진다. 인터넷이 잘 되니 이때 아니면 언제 하나 싶어 미뤄 놓은 이후의 일정도 다시금 계획해본다. 


누군가 시켜서 하는 일은 아니지만 하고 나면 미뤄둔 방청소를 끝낸 것처럼, 밀린 방학숙제를 해치운 것처럼 속이 다 시원하다.


밥을 해 먹고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시간을 갖고
따뜻한 물로 씻고 편안한 침대에서 잠드는 하루.

여행을 떠나와 매일 주말 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정작 일상의 주말에서 당연했던 것들이 지금은 얻기 힘든 호사스러움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놀면서도 쉬고 싶다 투정을 부리고 그는 쉬어도 쉰 것 같지 않다 또 투정을 부렸나 보다. 가지지 못한 것을 그리워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비극이라고, 나는 지금 내가 바라는 시간을 살고 있으니 괜찮다고 나의 투정은 가벼이 넘기지만, 그의 투정은 내심 마음에 걸렸다. 나의 호기심이 그의 휴식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할 일 없는 하루, 우리 방의 작은 창을 제 집 드나들듯 넘나드는 고양이와 놀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니 비로소 안심이 된다. 내가 원하는 오늘, 그에게 필요한 시간, 우리가 바라는 여정은 매 순간 가장 중요한 것들이다. 한 자리에 안주하지 못하고 또다시 무언가를 그리워하게 될 테니 그 무언가를 찾는 것은 평생의 과제가 되겠지만 함께 마음을 들여다봐 줄 이가 있어 자주 외롭진 않을 것이다.


물 찬 우유니에 빨리 가야 한다더니 엉뚱한 마을에 눌러앉은 우리를 보고 한 친구는 대체 우유니는 언제 가냐고 물었다. 여기서 산 쌀을 다 먹으면 떠나겠노라 말했다. 


여행에 일상이 묻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야 여행이 일상인 삶을 살고 있다며 허세까지 부렸다. 한동안 더 누리고 싶은, 내가 꿈꾸던 허세.













걸음의 속도는 점점 더, 예상보다 훨씬 더 느려지고 있다. 느림은 좋지만 처음에 경비를 아끼겠다고 마일리지 항공권으로 날아온 탓에 브라질에서 아웃하는 날짜가 정해져 있는 것이 문제다. 이런 속도로는 정해진 날짜에 맞추는 것이 불가능한데, 항공사에 문의해보니 다른 날은 티켓이 없어서 변경이 안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시간에 쫓기긴 싫고, 원하는 대로 움직이자니 티켓을 버려야 한다. 


남는 것은 시간이라지만 언제나 시간과 돈을 저울질해야 하는 장기 여행자의 숙명. 


“천천히 생각하자. 미래의 고민은 미래의 우리가 해줄 거야.”


바람직한 자세로 고민을 미뤄왔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날이 오면 결국 저 별 것 아닌 저울질이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된다. 당장 수크레를 떠나 우유니로 향하면 언제 다시 인터넷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으니 오늘이 그 날이다.


수크레의 마지막 밤, 아니 이미 새벽 한가운데에 와서야 기존 티켓을 버리고 새로운 항공권을 사기로 한다. 어차피 새로 사는 것, 이참에 건너뛰어서 아쉬웠던 콜롬비아까지 갔다 가자고.


결제한다? 이거 누르면 끝이야. 환불도  . 알지?”

, . 마음 정한 거야!”


딱히 역할을 구분한 적은 없었는데 언제나 마지막 클릭은 나의 담당이다. 왜 이 긴장감은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가 않는지,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되는 단 한 번의 클릭을 위해 온몸에 힘을 주고 입에서는 온갖 요란한 소리를 발사한다. 항상 가장 저렴한 항공권을 검색하니 환불이나 변경 따위 될 리가 없고 그래서 긴장감이 몇 배는 더한 거라고 핑계를 대 보지만, 아무리 그래도 손가락이 너무 떨린다. 도무지 우아해질 수가 없다. 


“잠깐만, 잠깐만! 혹시 그 사이 마일리지 티켓 자리가 생겼을지도 모르니까 딱 한 번만 더 검색해보자. 딱 한 번만. 응?”


망설임병이 도졌다. 고쳐지지 않는 나의 망설임병. “우와, 이거 하자!" 지르는 것도 나, "여기 이런 것도 있대! 여기 가보자!” 계획을 바꾸는 것도 나, 정작 결정을 내려야 하는 마지막 순간에는 “잘 하는 거 맞을까? 더 좋은 게 있으면 어떡하지?” 망설이는 것도 나. 우리의 걸음이 더 느려지는 이유.


결국 마지막 결제의 순간을 앞두고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아무런 기대 없이 마일리지 항공권을 한번 더 찾아보기로 한다. 그런데 이게 웬 일. 바로 몇 시간 전까지 수도 없이 검색하고 전화로 문의해도 없던 항공권이 떡하니 두 장 나와있는 것이 아닌가. 완전히 마음에 드는 날짜는 아니지만 한 달 이상의 시간을 더 벌고 새로운 항공권을 사느라 거금을 지출할 필요도 없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기대하지 않은 순간에 이런 행운도 오는구나.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


망설임병이 우리를 구했다.


꿈인가 생시인가 얼떨떨한 새벽, 두 몸치는 서로를 얼싸안고 덩실덩실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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