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직 볼 수 있는 기억들

비포 선라이즈 (Before Sunrise, 1995)

by 이재경

기차 안, 독일인 남녀의 대화로 영화가 시작된다. 말다툼을 하는 듯 보이는 그들의 대화 사이에 시선은 다양한 승객들이 비춰진다. 그 사이에 이 영화의 주인공인 남녀의 모습이 번갈아가며 비춰진다. 여자 주인공은 점점 언성이 높아지는 독일인들이 주는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자리를 옮기게 된다. 자신과 가까운 자리에 앉은 그녀를 본 주인공 남자는 미국인이이다. 답답한 나머지 여자에게 영어로 저 독일인들이 왜 싸우는지 묻는데, 알고보니 여자도 프랑스인인지라 그 사연을 모른단다. 그렇게 서로에 대해 사소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이렇게 사소하고 일상적인 장면에서 시작된 남녀의 만남으로 아무도 모를 듯한 작은 이야기가 시작된다.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선라이즈>는 우연히 만난 어느 남녀의 짧은 사랑 이야기다. 관객은 이 남녀가 함께 오스트리아의 도시를 걸어다니며 수 많은 대화를 마치 사고 하나 일어나지 않는 우디 알렌의 영화를 보는 듯 자연스레 지켜볼 수 있다.

나는 예전에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스쿨 오브 락>이나 <버니> 같이 불안할 수 있는 어떤 것들을 미화하는 것을 참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을 갖았던 것도 벌써 10년 전이었는데, 세상에 얼마나 수 많은 이야기가 있었는지 잘 몰라서 그런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훗날 12년에 걸쳐 만들게 된 <보이 후드>를 보며 생각이 달라졌고 아주 나중에 보게 된 이 영화를 통해 깨달았다. '이 감독은 대단하다'고. <보이 후드>는 이 영화를 생각하게 할 정도로 정점이었다.


가끔 이런 영화들이 있다. 별 내용은 아닌데 재미있어서 계속 보게되는 그런 영화들.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작품들이 그런 편이라고 느낀다. <비포 선사이즈> 는 로맨스라는 장르 면에서 그것보다 조금 더 매력이 있다고 느낀다. 일상과 우연 사이 어디쯤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 사이로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를 로드 무브의 형식으로 틀을 잡고 이들의 남녀의 대화는 점점 감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멜로 영화를 보면, 많은 사람들은 영화의 전개와 캐릭터 간의 감정과 갈등 속에 자연스레 자리를 잡아가고 캐릭터들을 공감하면서 자신의 경험과 기억에 비추며 상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것이 씁쓸한 기억이건 아니건 영화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이 둘이 헤어지고 나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라는 개인적인 물음표를 가지며 끝나는 영화는 마무리 된다. 후속편이 나온 사실이 있기에 의미는 없지만... 적어도 나는 지난 경험 덕분에 이 영화의 장면들을 좋아한다. 대화의 끊기지 않는 흐름은 중립적이기까지 한데 남녀 관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참으로 그리웠던 것이다. 이렇게 수 차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나는 것 까지도 운이 이 좋은데 서로 한치라도 지겨워 하지 않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순수하다고 말해야할까. 순수한 것의 기준이 무엇일까.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점점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했다. 혼자 나 홀로 유럽을 걸었던 기억, 아름다운 풍경을 보았던 추억, 저녁에는 어떤 바에 들어가서 연주를 듣고 음악이 끝나면 박수를 보내며 모두가 즐거운 분위기 속에 빠져 드는 것. 어쩌다 찾은 과거의 사진 조각을 보며 그 기억을 회상하게 된 것. 영화 속의 남녀가 함께 놀이동산도가고, 걷어다니며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 행복해보인다. 오래동안 나는 저 삶을 동경했을지 모른다. 함께 하는 것만으로 기분 좋고 흐르는 시간조차 보이지 않는 순간들 말이다. 나는 겁이 많았다. 언젠가는 만나게 될 사람과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싶다. 영화 속 남녀가 헤어지며 다시 만날 것이라고 마음을 꼭 잡는 것 만큼의 희망을 안고 가고 싶다. 어서 후속편들을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