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I 통제와 비통제 7.
“어리석은 자는 친구도 적도 쉽게 만든다. 현명한 자는 불필요한 적을 만들지 않는다.”
-세네카
그런 사람이 있다.
이유도 없는데 그냥 싫은 사람.
직장 동료일 수도, 오래된 친구일 수도 있다.
심지어는 TV에서 본 적밖에 없는 연예인조차 괜히 불쾌하다.
돌이켜보면, 사실 뚜렷한 이유는 없다. 그냥 싫다.
재현씨에게는 개그맨 김영철이 그런 존재였다.
성대모사는 과장됐고, 개그는 시끄럽기만 했다. 생긴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그가 TV에만 나오면 재현씨는 성질을 내며 채널을 돌렸다.
좋아하던 예능프로그램에 그가 게스트로 나오면 화가 치밀었다.
“왜 여기까지 나오는 거야, 도대체?”
김영철을 바라보는 재현씨의 시선은 마치…
그렇다, 벌레 보듯 싫어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곤충학자 파브르조차 혐오한 벌레가 있었다.
연구실 책상 위, 작은 상자 속.
검은 등껍질의 딱정벌레가 꿈틀거린다.
파브르는 얼굴을 찌푸렸다.
“징그럽다… 저 다리 좀 봐. 끊임없이 꿈틀대며 기어오르는 것 같잖아.”
딱정벌레는 유리벽을 긁었다.
그 소리는 칠판 긁는 소리처럼 신경을 건드렸다.
곰팡이 섞인 악취까지 퍼졌다.
“이런 생물은 연구할 가치조차 없어. 최악이야.”
그는 등을 돌리려다 멈췄다.
“하지만… 이것도 곤충이다. 내가 피하면, 누가 이 생명을 이해해줄까?”
그날부터 파브르는 억지로라도 관찰을 시작했다.
며칠 뒤, 놀라운 장면을 목격한다.
딱정벌레가 자기 몸보다 몇 배 무거운 먹이를 끌고 가는 모습.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길을 잃어도 방향을 찾는다.
파브르는 중얼거렸다.
“이 작은 몸뚱이에, 이렇게 끈질긴 생명력이 숨어 있었다니…”
혐오스럽던 등껍질은 단단한 갑옷으로 보였다.
거북하던 소리는 “살아 있음의 신호”가 되었다.
그는 결국, 가장 싫던 벌레를 존경하게 됐다.
싫음은 상대가 만든 게 아니다.
내 마음이 만든 그림자일 뿐이다.
마음을 바꾸자, 흉측함은 사라지고 경이로움이 보였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싫은 감정은 상대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낀 렌즈의 문제다.
렌즈를 바꾸면, 미움은 이해로, 불편함은 배움으로 바뀐다.
세네카는 말했다.
“어리석은 자는 친구도 적도 쉽게 만든다. 현명한 자는 불필요한 적을 만들지 않는다.”
다시 재현씨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어느 날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김영철 얘기가 나왔다.
영어 공부 책을 냈다더라, 참 열심히 산다더라. 다들 그를 칭찬했다.
재현씨는 그가 대화 주제로 나온 것조차 불쾌했다.
얼마 후 서점에 들렀다가 그 책을 발견했다.
호기심 반, 비판 반. 책장을 넘겼다.
영어에 일가견 있는 재현씨가 보기에도 책은 잘 만들어져 있었다.
“흥, 남들이 도와줬으니 이 정도는 했겠지.”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인정했다. “그래도, 나쁘지 않네.”
그때부터였다.
TV에 김영철이 나와도 채널을 돌리지 않았다.
라디오까지 찾아 들었다. 청취율 1위라는 소식에 괜히 뿌듯했다.
김영철은 변한 게 없다.
달라진 건 재현씨였다.
그가 싫어한다고 해서 김영철이 상처받은 것도 아니었다.
손해를 본 건 오히려 재현씨였다.
판단이 바뀌니 감정도 바뀌었다.
그를 싫어해 괴로웠던 이유 없는 고통에서 자연스레 해방됐다.
이제, 내가 유독 싫어하는 사람을 떠올려 보자.
그가 정말 나에게 해를 입혔는가?
아니면, 왜 싫은지조차 기억나지 않는가?
내가 그를 싫어한다고 해서, 그가 상처받는가? 손해를 보는가?
아니다. 손해를 보는 건 오직 나다.
싫은 마음을 키우는 건, 내 앞에 적을 세워두고 스스로를 찌르는 꼴이다.
공격조차 할 수 없다. 명분이 없으니까.
남는 건 내가 입은 상처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판단을 멈춰라.
“저 사람은 싫다.” 이 감정적 선언을 잠시 멈추면, 미움이 의외로 쉽게 사라진다.
놀랍지 않은가? 그토록 강했던 감정이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증거다.
둘째, 기록하라.
오늘 어떤 감정이 생겼는지, 왜 그런 감정을 가졌는지.
쓰다 보면 감정은 사고와 분리된다.
그 순간, 상황을 합리적으로 볼 힘이 생긴다.
싫음은 상대의 탓이 아니다.
내 마음이 만든 그림자다.
그림자를 걷어내는 순간, 그곳엔 배움과 자유가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