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잔여시간을 확인했다. 297시간. 한 달을 쉬고도 남는 시간이다.
투잡을 시작한 뒤로 달라진 것이 있다면 휴가를 쓰는 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쓸 수가 없게 됐다.
물론 가족 행사나 오전 직장 회식으로 휴가를 내는 날은 있다. 하지만 그건 휴가가 아니다.
진짜 휴가, 그러니까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날. 그런 날은 투잡을 시작한 뒤 단 한 번도 없었다.
하루 휴가의 가치는 간단하게 계산된다. 시급에 8시간을 곱하면 된다. 나는 직장이 둘이니 거기에 2를 곱하면 그게 하루 휴가의 가격이다.
문제는 투잡러에게 둘 중 하나만 쉬는 날은 진짜 휴가가 아니라는 거다.
오전만 쉬면? 오후 출근이 기다리고 있어서 아침부터 의욕이 꺾인다.
오후만 쉬면? 오전 일에 치여서 에너지가 바닥난다. 반쪽짜리 휴가는 휴가가 아니다. 그냥 좀 덜 바쁜 하루일 뿐이다.
진짜로 쉬려면 오전, 오후 둘 다 휴가를 내야 한다. 그걸 돈으로 환산하면 하루 16시간.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숫자가 꽤 크다. 그래서 나는 쉬지 않는다. 아니, 못 쉰다. 휴가는 너무 비싸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쌓인 휴가 시간이 일종의 보험 같다는 생각도 든다. 미국 법상 안 쓴 휴가는 퇴사할 때 회사가 돈으로 환급해야 하니까 적어도 쉽게 잘릴 일은 없겠지. 하지만 내 휴식이 돈으로만 존재한다는 게 씁쓸하다
돌이켜보면 투잡을 시작한 뒤로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대학생 때는 달랐다. 방학마다 배낭 하나 메고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갔다. 오지에서 2주짜리 트레킹도 했다. 아무 계획 없이 떠나던 그때, 시간은 정말 내 것이었다.
직장인이 된 후엔 본업과 부업 사이에서 숨 쉴 틈이 없었다. 본업이 둘이 된 후엔 아예 꿈도 못 꾸게 됐다. 결혼하고 아이가 생긴 후엔 더했다.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었다.
결국 휴식도 습관이다. 몸이 쉬는 법을 잊어버리면 오히려 쉬는 시간이 낯설고 불편하다. 멍 때리는 법을 잊어버렸다. 취미도 없어진 지 오래다. 막상 시간이 생기면 아이랑 노는 것 외에 뭘 해야 할지 아이디어가 안 떠오른다.
그런데 아이랑 놀 때도 몸은 피곤해서 집중이 안 된다. 아이가 뭐라고 말하는데 귀에 안 들어온다. 놀이터에서 그네를 밀어주면서도 머릿속에선 다음 주 스케줄을 정리하고 있다.
이게 과연 쉬는 걸까.
그렇다고 하루 종일 누워 있자니 휴가가 아깝다. 시급 곱하기 16시간. 그 돈이면 뭘 할 수 있는데. 아이 유치원비, 저축, 투자 자금.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결국 이도 저도 못 하고 휴가는 계속 쌓여만 간다.
이상한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몸에 오한이 들고 한 시간마다 구토가 나왔다. 출근하려고 했는데 몸이 거부했다.
출근 시간이 다가오면서 머릿속에선 경보가 울렸다. 하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처음으로 당일 휴가를 신청했다. 오전, 오후 직장에 메시지를 보냈다. "죄송합니다. 오늘 몸이 안 좋아서 휴가 쓰겠습니다." 메시지를 보내고 나니 오늘 예정된 미팅들이 걱정됐다. 동시에 이상한 안도감도 느껴졌다.
그날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것도. 핸드폰도 안 봤다. 노트북도 안 켰다. 그냥 계속 누워서 잠만 잤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걸 봤다.
오랜만에 해 지는 걸 보면서 생각했다. 왜 우린 매일 일어나는 아름다운 광경을 안 보고 스크린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하루를 마무리할까. 하지만 다음 날이 되면 결국 또 형광등 아래 스크린 앞에 앉아 있겠지.
오랜만에 긴 잠을 잤다. 한편으론 "오늘 16시간 치 급여를 날렸네" 하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한편으론 "아, 제대로 쉬었다"라는 개운함이 왔다.
다행히 저녁쯤 되자 몸이 회복됐다. 저녁에 아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왔다.
"아빠! 오늘 왜 집에 있어?"
평소 같으면 오후 일 때문에 서재 문을 닫고 일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빠 오늘 쉬는 날이야."
아이가 환하게 웃었다. "그럼 같이 놀자!"
같이 레고를 만들고 자동차 놀이를 했다. 아이는 신이 났고 나도 행복했다. 일 생각 없이 시간 걱정 없이 그냥 아이랑 놀았다.
단 2시간이었지만 그 2시간이 한 달의 휴가보다 더 충만했다.
그날 밤 깨달았다. 진짜 휴가는 온전히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것이었다. 돈 계산하지 않고, 시간 재지 않고, 그냥 여기 있는 것.
물론 나는 여전히 투잡러다. 내일도 모레도 두 직장을 오간다. 휴가는 계속 쌓일 것이고, 나는 여전히 돈으로 환산하며 망설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아이와 놀면서 보낸 그 2시간. 해 지는 걸 보며 생각에 잠겼던 그 시간.
일주일 후 휴가를 써서 오후 일을 뺐다. 물론 오전엔 여전히 일하고 8시간 치 급여는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괜찮다. 그 반나절이면 충분하다.
아이 유치원 데리러 가서 같이 놀이터에 가는 것. 그걸로 충분하다.
한 달 휴가는 여전히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반나절 휴가는 가능하다.
완벽한 휴가를 포기하고, 작지만 진짜인 휴식을 선택하는 것. 그게 투잡러인 내가 찾은 답이다.
휴가는 여전히 250시간 이상 남아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이라도 쓰려고 한다. 돈이 아까워도 몸과 마음이 "더는 못 하겠어" 하고 말하기 전에 휴식을 가져보려 한다.
진정한 휴가란 무엇인가. 한 달도, 일주일도 아니다. 온전히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것. 돈 계산하지 않고, 내일 걱정하지 않고 그냥 여기 있는 것.
비록 2시간이라도 반나절이라도 진짜로 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