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질을 보는 법 - 아는 만큼 보인다
22살, 난 배낭을 메고 유럽으로 떠났다. 세 달 동안의 여행 중 가장 별로였던 곳을 묻는다면? 로마다.
기대했던 콜로세움은 생각보다 작았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처럼 피 튀기는 전투가 벌어질 것 같던 거대한 원형 경기장은, 실제론 바닥도 없이 다 무너진 건물이었다.
다른 유적지들도 마찬가지였다. 터만 남은 돌무더기들. 몇 개 언어로 써놓은 안내판을 읽어봐도 여기서 대체 뭘 했는지 감이 안 왔다. 뙤약볕 아래서 안내판 한두 개 읽다가 결국 포기했다.
'난 유적지랑 안 맞는 사람인가 보다.'
호스텔에서 영국 대학생을 만났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그 친구가 미국 사는 한국인인 나를 신기해하며 같이 점심 먹자고 했다. 그렇게 반나절을 같이 돌아다니게 됐다.
베네치아 궁전 근처를 지나는데 갑자기 그 친구가 흥분한 목소리로 도로 한복판을 가리키며 달려갔다.
"저기! 저기 봐!"
난 그 건물을 이미 몇 번 지나쳤다. 안내판도 없고 유심히 보는 사람도 없어서 그냥 스쳐 지나갔던 곳이다. 폐허에 고양이들만 우글우글했다.
"여기가 어딘 줄 알아? 줄리어스 시저가 암살당한 자리야!"
라르고 디 토레 아르젠티나. 세계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정치가이자 장군이 죽은 바로 그 자리였다.
그 친구는 평범한 기둥 하나를 보고도 "저건 2천 년 전 신전 일부야"라며 신났고, 내가 그냥 지나쳤던 분수대 앞에서 한참을 설명했다.
같은 거리를 걸었는데 우리가 본 로마는 완전히 달랐다.
그날 밤, 호스텔 침대에 누워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내겐 로마에서의 이틀이 더 남아 있었다. 문득, 그동안 내가 껍데기만 핥는 여행을 한 건 아닌지 회의감이 들었다.
호스텔 옥상에서 맥주 한 캔 들고 책꽂이에 고스란히 꽂혀 있던 로마역사에 대한 낡은 책을 펼쳤다.
시저가 죽던 날, 원로원 의원들은 그가 왕이 되려 한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브루투스마저 칼을 들었다. 시저는 23군데나 찔려 죽었다.
로마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난 다시 그곳에 갔다.
이번엔 달랐다. 책에서 본 원형 구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 기둥 너머 어딘가에서 시저가 쓰러졌을 거다.
택시가 공항으로 가는 동안, 창밖으로 로마가 스쳐 지나갔다.
저 건물은 뭘까. 저 분수는. 저 교회는.
난 이미 로마에 오기 전부터 답을 가지고 왔다. "여기가 로마 최고 맛집이야." "콜로세움은 이렇게 생겼을 거야."
답을 가진 사람은 질문하지 않는다. 질문하지 않는 사람은 보지 못한다.
새로운 것을 보려면 기존의 그림을 지워야 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림을 지우면 당장 무엇을 봐야 할지 막막해지니까. 가이드북을 따라가면 적어도 안전하다.
남들이 다 가는 길이고, 다들 찍는 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틀릴 일이 없다.
하지만 그렇게 살면 남들이 본 것만 보게 된다. 남들이 본 것만 보면, 남들이 생각한 대로만 생각하게 된다.
10년도 더 지난 지금,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은 것은 웅장한 콜로세움도, 화려한 트레비 분수도 아니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그 폐허, '라르고 디 토레 아르젠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