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 원짜리 샴푸

3: 본질을 보는 법 - 감정과 사실을 분리하기

by 에드유

본질을 본다는 건 뭘까? 겉으로 드러난 것을 의심하고, 숨겨진 진실을 찾는 것? 아니다.

본질을 본다는 건 내 감정과 객관적 사실을 분리하는 것이다.


약대에 입학하고 얼마 안 된 후부터 머리가 부쩍 빠져서 졸업한 지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 탈모약을 먹고 바르고 다 해봤지만 이미 빠져 슬슬 M자의 모습을 보이는 이마는 채워질 리 없다.


새로 방문한 미용실에서 좋은 샴푸를 쓰라는 말에 생각지 않았던 탈모샴푸에 대해 알아보게 되었다. 예전엔 "어차피 1분 두피에 바르고 씻어낼 거 뭐 하러 비싼 거 쓰지"란 생각이 들었지만, 한 올 한 올이 귀중해진 요즘은 달랐다.


미용사가 추천해 준 마이크로바이옴 샴푸를 검색해 봤다.

10만 원. 한 통에 10만 원이었다. 한번 짤 때마다 몇백 원씩 나가는 셈이다.


습관적으로 성분을 검색했다. 약사가 된 이후 생긴 직업병이다.

샴푸 안에 들어있다는 미생물, 두피 마이크로바이옴. 그럴듯하게 들렸다. 연구 데이터베이스를 뒤졌다. 탈모와 관련된 연구는 없었다.


두피 미생물 구성에 영향을 준다는 연구는 있었지만, 그게 좋은 영향을 주는지, 어떻게 탈모를 막는지에 대한 연결고리는 없었다.


나도 호구가 될 뻔했구나.

아니, 이미 호구였는지도 모른다. 거울 앞에 서서 M 자로 빠진 이마를 보며 느꼈던 그 절망감.


그 감정이 나를 어디로든 데려갈 수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10만 원짜리 샴푸가 있는 쇼핑몰로. 아니, 더 정확히는 근거 없는 희망이 있는 곳으로.


희망의 가격표


나에게 머리카락은 단순히 머리 두피에 심어져 있는 털 이상이다.

가장 쉽게 나이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이고, 스트레스의 바로미터며 실패한 유전자의 슬픈 발현이기도 하다.


통제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늙어간다는 사실을 매일 아침 거울로 확인하는 일.

의외로 뷰티에 돈을 잘 안 쓰는 남자들도 탈모 제품을 살 땐 지갑을 쉽게 연다.

마지막 한 올이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임상 효과가 있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조그마한 근거가 있다면, 간절한 마음에 뭐라도 하는 거다. 오히려 비쌀수록 더 효과가 있을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나도 그랬다.


약국에서 일하면서 수없이 봤던 광경이었는데, 막상 내 일이 되니 똑같았다.


"무릎이 아파서요" 하며 5만 원짜리 글루코사민을 사가시는 할머니의 눈빛과, 거울 앞에서 M자 이마를 들여다보며 혹시 하루새 더 넓어지지 않았나 걱정하는 내 눈빛이 다르지 않았다.


감정이 앞서는 구매에선 호구가 되기 딱 좋다. 건강과 미용, 노화와 질병. 우리의 두려움이 집중된 곳에 시장이 생긴다. 그리고 그 시장은 효과가 아니라 희망을 판다.


비싼 것이 정말 효과적일까?


탈모 치료에서 실제로 효과가 입증된 성분은 세 가지다. 미녹시딜, 피나스테리드, 더타스테리드.

미녹시딜은 약국에서 5천 원에 산다. 10만 원짜리 바이옴 샴푸보다 20배 저렴하다. 그런데 임상 연구는 수백 편. 실제 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답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비싼 제품은 효과를 파는 게 아니라 희망을 판다.


10만 원짜리 샴푸를 살 때 내가 정말 사는 건 미생물이 아니었다. "이번엔 다를 거야", "이걸로 머리카락을 지킬 수 있을 거야"라는 희망이었다.


그 희망은 5천 원의 가치가 아니라 10만 원의 가치로 느껴진다. 그래서 산다.


성분을 확인하고, 연구를 찾아보고, 근거를 따지는 일. 처음엔 그저 직업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내 돈을 지키는 방법이 됐다.


간단한 원칙 몇 가지.


성분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확인하고 임상 연구가 있는지 찾아본다. 단순히 "연구됐다"가 아니라 "효과가 입증됐다"인지. 연구가 제조사 후원인지, 독립적인지.


그 후엔 같은 효과의 저렴한 대안은 없는지 확인한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걸 배웠다. 내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


"마지막 한 올이라도 붙잡는 심정으로"라는 생각이 들 때. "이것만은 아끼면 안 될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들 때. "이번엔 다를 거야"라는 생각이 들 때. 그때가 위험한 순간이다.


멈추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본다. 실과 득을 차가운 머리로 따져본다.


이 원칙이 적용되는 다른 곳들


이런 감정 인식의 원칙은 소비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주식 투자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샀다고, 돈 벌었다고 할 때 느껴지는 FOMO(Fear of Missing Out)가 고점일 가능성이 많다.


"지금 안 사면 기회를 놓친다"는 조급함이 들 때가 바로 위험한 순간이다.

그럴 때일수록 차갑고 분석적으로 생각해서 그동안의 상승이 일시적인지, 아니면 유지될 만한 근거가 남아 있는지를 따진 후 들어가지 않으면 크게 손해를 볼 수 있다.


직장 선택도, 인간관계도, 중요한 결정 앞에서는 언제나 비슷하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안 돼", "다들 이렇게 하던데", "내 나이에는 이래야 하는 거 아냐" 같은 생각이 들 때.


그 순간 한 발짝 물러서서 물어볼 필요가 있다. 이게 사실인가, 아니면 불안인가.


비싼 것을 사도 괜찮은 이유


모든 비싼 제품이 잘못된 선택은 아니다.


어떤 제품은 정말 비싼 만큼의 가치가 있다. 더 좋은 원료, 더 정교한 제조 공정, 더 안정적인 품질. 이런 것들은 비용이 든다.


10만 원짜리 샴푸를 사는 게 나쁜 것도 아니다.

그 샴푸의 향이 좋아서, 사용감이 좋아서, 브랜드가 좋아서 산다면 그건 합리적이다.

문제는 "탈모에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기대로 사는 것이다.


마케팅을 비난할 수도 없다. 그들은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을 만든다. 우리의 불안이 시장을 만들고, 시장은 그 불안을 먹고 자란다. 단순히 자본주의의 일부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감정을 느끼되, 사실로 판단하기


거울을 본다. M 자로 빠진 이마를 본다. 여전히 불안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 불안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 수 있는지를. 10만 원짜리 샴푸가 아니라 근거 없는 희망으로 데려갈 수 있다는 걸.


감정을 느끼는 것과 감정에 휘둘리는 것은 다르다.


10만 원짜리 샴푸를 보며 희망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 감정을 인식하고 한발 물러서서 생각한다."이건 희망이지, 사실이 아니야."


내 감정은 소중하다. 하지만 내 돈도, 내 건강도 소중하다. 그래서 선택한다. 감정을 느끼되, 사실로 판단하기를.


감정과 사실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법. 불안을 인정하되, 불안이 지갑을 열게 두지 않는 법.


이것이 내가 배운, 본질을 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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