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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nverselow Mar 18. 2021

얼버무리기


얼버무리다 [동사] : 말이나 행동을 불분명하게 대충 하다.


  얼버무리기는 주로 곤란한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다. 더 정확하게는 실생활에서 안 친한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싫을 때 사용하는 화법이다.


  나는 얼버무리기를 당할 때마다 상대방과 내가 친밀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사살받는 기분이다. 나랑 대화하는 게 상대방 입장에서는 "곤란한 상황"에 속한다는 것이니까.


  특히나 굳이 숨길 이유가 없는 것들까지도(예를 들자면 조금만 찾아봐도 쉽게 알아낼 수 있으며 딱히 개인적이지도 않은 정보의 조각 따위를) 얼버무리는 사람을 보면 내가 그런 것조차도 알려줄 수 없을 정도로 못 미더운 사람인가 싶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상대방의 심리가 궁금해진다. 나를 친구나 지인이 아니라 자기한테서 정보를 캐낼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 정도로 인식하는 것일까?


  나는 꽤나 솔직한 성격이고, 모든 사람에게 나 정도의 솔직함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 정도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버무리기를 당할 때마다 나는 허탈감을 느낀다. 나는 그 사람과 친해지기 위해 지금까지 그 사람과 나 사이의 벽을 천천히 허물어왔는데, 내가 하나하나 떼서 내려놓았던 벽돌을 그 사람이 다시 가져가서 쌓는 꼴이니까. 둘 다 벽을 허물고 싶어해야 친해질 수 있는 법인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은 나와 친해지기를 그닥 원치 않았던 것이다. 요컨대 아무도 시키지 않은 "노가다"를 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오는 허탈감이다.


  앞서 이야기한, 숨길 이유가 없어 보이는 것들까지도 얼버무리는 사람을 볼 때는 더한 허탈감이 느껴진다. 내가 조심스럽게 뺐던 벽돌 하나를 그냥 뺏는 것도 아니고 호들갑을 떨며 뺏어서 다시 쌓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갑자기 포크레인을 몰고 벽으로 돌진한 것도 아니고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채지도 못할 위치에 있는 것만 골라서 뺀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렇지만 그 사람을 비난할 마음은 전혀 없다. 내가 그 사람이 얼버무린 것을 딱히 숨길 이유가 없는 무언가로 여기듯이 그 사람 입장에서는 내가 뺀 벽돌이 귀중한 것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나에겐 솔직함의 표현이었던 것들이 그 사람에겐 부담으로 다가왔다는데 내가 뭘 어찌하겠는가.


  비난할 마음이 없다는 대목에서 눈치챘겠지만, 얼버무리기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모든 사람이 솔직함을 디폴트로 여겨야 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는 법이다. 넘어오지 말라고 그어둔 선을 굳이 넘어가는 건 "비매너"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럼 이 글을 왜 쓴 것이냐고? 얼버무리기는 곧 밀어내기의 동의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솔직함이 무모함의 동의어는 아니기 때문에 나는 얼버무리기를 당할 때마다 기꺼이 밀려나 준다. 아니, 사실 나도 그 친구를 밀어낸다고 보는 게 맞겠다. 벽을 사이에 두고 불편하게 대화하다 보면 왜 굳이 이 친구와 대화를 해야 하나 싶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로 밀어내면서 점점 멀어져가는 것이다. 얼버무렸던 사람이 의도했던 대로. 나는 내 벽 뒤로, 그 사람은 그 사람의 벽 뒤로, 원래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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