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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nverselow Jul 02. 2021

<비포 선라이즈> 리뷰

평점: 10/10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말이 있다. 두 사람이 만나서 연인으로 발전하려면 적절한 시점에 주어진 적절한 기회를 적절한 방법으로 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비포 선라이즈>는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는 "사랑은 타이밍인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사랑은 타이밍이다." 라는 대답으로 끝난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제시와 셀린느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 얘기를 나누다가 서로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기차가 빈에 도착하자 제시는 미친 생각인 것을 알지만 물어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면서 기차에서 함께 내려서 빈을 여행하자고 셀린느를 설득하고, 셀린느는 이를 받아들인다. 그렇게 해서 함께 내린 둘은 하루 동안 빈을 돌아다니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이렇게만 보면 상당히 낭만적인 우연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사실 둘의 첫만남은 "기차에서 만난 이방인 현상"이라는 심리학적 용어로 설명할 수 있다. 기차에서 만난 이방인은 나에 대한 정보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낯선 사람이다 보니 그 사람이 더 편하다고 느끼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을 실제로 보다 보면 "이건 사실 심리학적으로 설명 가능해"와 같은 메마른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데,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사랑에 빠질락 말락 하는 남녀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너무나도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시는 같이 내리자고 제안하는 것이 미친 짓이라고 말하지만, 그의 제안이 미친 짓이 아니라 적절한 타이밍을 잡은 것이라는 사실을 그 자신도, 셀린느도, 그리고 그걸 보는 우리도 알고 있다. 두 배우가 연기를 통해 우리에게 둘이 자신의 감정에 대해 의구심을 느끼면서도 상대방에게 빠져드는 것이 불가항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납득시켰기 때문이다.


  제시와 셀린느가 빈을 여행하는 부분은 수많은 미장센의 연속이다. 빈이라는 배경 자체가 낭만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연출 자체가 90년대의 아날로그식 썸을 너무나도 잘 그려내고 있다. 오늘날처럼 카톡과 인스타로 상대방의 반응을 면밀히 파악하고 고백이라는 목적지까지의 단계를 체계적으로 밟아나가는 디지털식 썸이 아니라 재고 따지지 않기 때문에 표현을 아끼지 않는 아날로그식 썸 말이다. 특히 레코드 가게에서 둘이 함께 음악을 듣는 장면은 가히 일품이라 할 만하다. 상대방을 쳐다보고 싶지만 아직 서로를 뚫어져라 쳐다볼 만한 사이는 아니기에 상대방이 다른 곳을 보고 있을 때 곁눈질을 하는 제시와 셀린느로부터 우리는 사춘기의 소년 소녀와도 같은 풋풋함을 느낄 수 있다. 이 장면에서 느껴지는 날것의 설렘과 부끄러움, 긴장감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 시절 감성"의 정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영화의 진가는 사실 둘의 만남이 아니라 둘의 헤어짐에서 드러난다. 제시와 셀린느의 첫만남은 소설 같았지만 그들의 헤어짐은 현실에 존재하는 여느 연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둘은 모두 사랑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이었고, 사랑의 영원함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둘은 6개월 후 같은 곳에서 만나자는 기약 없는 약속과 함께 서로를 기꺼이 떠나보낸다.


  우리는 어떤 기억이 자신에게 진정으로 소중하다면 그것을 절대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돌아가신 할머니나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심심풀이 땅콩으로 삼지 않고, 깊이 사랑했던 누군가와의 소중한 추억을 싸구려 쥐포와 다를 바 없는 술안주로 삼지는 않듯이 말이다. 제시와 셀린느가 서로를 떠나보낸 이유는 아마 이것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연애를 하고, 다투고, 화해하고, 다시 다투고 결국은 헤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겪고 나면 빈에서의 첫만남은 아련한 추억이 아니라 술안주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전 연인과의 불쾌한 기억으로 남게 될 테니까. 그들은 빈에서의 하루가, 어쩌면 그 하루를 함께 보낸 상대방 자체가 너무나도 아름답고 소중했기에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는 무언가가 되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제시와 셀린느는 그들이 연애를 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헤어질 것이라고 확신했을까? 그 답은 연인이라는 관계에 수반되는 의무감에 있다. 아무런 의무감 없이, 사실은 약간 무책임할 정도로 서로의 감정에만 오롯이 집중했기 때문에 성립될 수 있었던 관계에 의무감으로 가득한 연인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관계는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제시와 셀린느는 모두 사랑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였기에 자신이 그 의무감을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이로 인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것이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무책임함으로 인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아름다운 첫만남의 추억까지 더럽히고 싶지는 않았기에 빈에서의 하루를 끝으로 헤어짐을 택한 것이다. 애초에 시작을 하지 않으면 끝을 볼 일도 없을 테니까.


  이 대목에서 나는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것을 여실히 느꼈다. 제시와 셀린느는 타이밍이 맞아서 만날 수 있었고,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만났을 당시에 얼마 전에 연인과 이별하고 연애에 회의감을 느끼게 된 사람들이 아니라 사랑을 처음으로 해보는 정열적인 사람들이었다면 영화는 제시와 셀린느가 서로를 떠나보내는 결말이 아니라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 결말을 맞았을 것이다(물론 그랬다면 비포 선셋과 비포 미드나잇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둘은 우리에게 아무리 소중한 인연이고 운명적인 사랑이더라도 조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당연하지만 슬픈 깨달음을 주고 있다.


  우리는 제시와 셀린느가 6개월 후 빈에서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재회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둘의 미래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것이 상당히 클리셰적임에도 불구하고 속편인 <비포 선셋>을 기대하게 된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두 사람의 사랑의 유효기간이 해가 뜨기 전까지였으니 <비포 선셋>에서는 해가 지기 전까지가 아닐지 궁금해하면서 말이다. 정말로 인상 깊게 읽은 책은 다시 읽을 때 결말을 알더라도 책장을 넘기는 것이 기대되는 법이다. 이 영화는 책으로 따지면 그런 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평점은 10/10. 로맨스 영화를 그닥 좋아하지도, 자주 보지도 않는 내가 다시 보고도 나중에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명작이다. 러닝타임 내내 끊어지지 않는 제시와 셀린느의 수다삼매경을 보면 저렇게 하루종일 서로를 바라보면서 대화하기만 해도 즐거운 연애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또한 영화의 배경인 빈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그려져 있어 (특히 코로나 시국에는 더욱) 빈에 직접 가보고 싶어진다. 언젠가 빈에 가보게 된다면 <비포 선라이즈> 촬영지 투어를 해볼 생각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Maroon 5 Daylight이라는 노래를 들어보기를 추천한다. 이 영화를 보고 작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사가 영화의 내용과 완벽히 맞아떨어진다.


https://youtu.be/Cx6PaF0odCw


Here I am waiting

I'll have to leave soon

Why am I holding on

We knew this day would come

We knew it all along

How did it come so fast

This is our last night

But it's late and I'm trying not to sleep

'Cause I know when I wake

I will have to slip away

And when the daylight comes I'll have to go

But tonight I'm gonna hold you so close

'Cause in the daylight we'll be on our own

But tonight I need to hold you so cl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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