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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연 Apr 04. 2021

장국영다운 장국영의 영화들

- 그의 18주기를 보내며...

2003년 4월 1일. 18년의 세월이 감각되지 않는다. 빠르게 흘러갔는지, 더디게 지나갔는지 잘 모르겠다. 여기저기에서 그를 추억하고 그리는 글들이 많다. 숱한 전작들의 제목을 보니 꽤 긴 시간동안 우리가 그와 함께 했다는 것만 알겠다.

나는 사실 그의 팬이 아니었다. 유혈 낭자한 액션, 신파 가득한 멜로도 별로, 마초캐릭터들이 득실대는 남자배우들만 보는 것도 싫증났었다. 게다가 홍콩배우들은 왜 그리 찐하게들 생겼는지. 여기에 장국영도 다 해당되어서 나에게 그는 그냥 그런 홍콩배우 중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가 가고 난 뒤 나는 그가 좋아졌다. 나이가 들면서 더욱. 곁에서 사라져버린 뒤에야 진가를 알게 되는 경우... 많다. 시간과 존재의 역설적인 상관관계는 비록 안타까운 일이나 또한 영광이지 않겠는가. 그가 살았던 시간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다는 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행운이 아닐 것이니.

내가 뒤늦게 알아버린 그의 매력은 홍콩느와르에 최적화된 이가 바로 장국영이라는 점이었다. 그 눈빛이, 그의 마음이, 그냥 그 사람 자체가 온통 느와르였다. 홍콩느와르는 어쩌면 장국영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홍콩느와르는 곧 장국영과 동의어가 아닐까 싶을 만큼 그가 분한 모든 캐릭터는 하나의 이미지로 관통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타나토스(죽음의 욕구)를 긍정하는 편이다. 유기체가 무기체로 환원하려는 에너지이며 근원을 향한 동경이다. 프로이트는 ‘사랑 안에 죽음이 숨어있다’는 표현으로 강한 생(生)의 의지이자 쾌락의 절정인 에로스에서 바로 자극과 긴장의 완벽한 소멸, 즉 죽음의 한 조각을 맛보게 된다고 피력한 바 있다.

그리하여 나는 진실로 그가 택한 죽음이 오히려 그의 생이 얼마나 충만했고 아름다웠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를 보내는 내 슬픔의 자위일 수도 있겠으나 그 믿음을 버리고 싶지는 않다.

그의 많은 작품들 중에서 어떤 것은 그를 스타로 만들어 줬고 어떤 것은 그를 부자로 만들어줬을 것이다. 그런 기준의 영화들은 내가 잘 알지 못한다. 관심도 없고. 그의 많은 작품들 중에서 내가 고른 것은 장국영이 아니라면 아예 만들어지지 못했을 작품들이다. 데이, 아비, 보영은 데이, 아비, 보영이 아니라 그냥 장국영이었다. <패왕별희> <아비정전> <해피투게더> 속 그의 얘기들이다.



□ 패왕별희(천카이거, 1993)


이 영화를 보지 않고 장국영을 말하지 말자. 데이가 우희로 살 수밖에 없었던 삶은 장국영이 그 모든 캐릭터로 함께 살았겠구나 하는 걸 너무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완벽하게 일체되지 않으면 연기를 할 수 없는, 작품마다 온몸의 피까지 바꿔댔을 천생배우.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문화대혁명은 장국영이 살았던 시절의 얘기가 아니지만 만약 그 시절에 장국영이 경극배우였다면 그냥 데이가 아니었을까.
손가락이 잘린 채 어머니에게서 버려져 ‘남자도 아닌 여자도 아닌’ 경극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했던 데이. 영화에서 데이가 그런 정체성으로 살아야 했던 것처럼 인간 장국영의 정체성은 아마도 데이로부터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은 또한 나만의 것일까.


그저 장국영을 알게 되는 사실만으로도 좋아할 만한 영화지만, 사실 이 영화는 손에 꼽을 불후의 명작이다. 문화대혁명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예술과 사랑과 인생 나아가 인간의 운명이라는 거대담론들을 유려하고 유수하게 뽑아내고 있으니. 한동안 먹먹해진 가슴을 부여잡느라 고생을 하게 될 것이다.


최근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로 재개봉 상영 중이니 이 기회에 꼭 감상해 보시길.



□ 아비정전(왕가위, 1990)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늘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에 꼭 한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장국영을 대표하는 수식어, ‘발 없는 새’. 그 스스로 ‘<아비정전> 이야기의 절반은 내 얘기’라고 했을 만큼 아비의 일생은 장국영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었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그의 마음. 슬픔 속에서 묻어나오는 몸짓. 위악으로 살 수밖에 없는 절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아지지 않는 사랑의 절절한 갈구.


가장 완벽하게 장국영의 타나토스가 묻어나는 작품이다. 어머니에게서 버려졌던 트라우마 때문일까. 그의 타나토스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서 자궁으로의 회귀를 갈망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심연의 울림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25년간 배우로 사는 동안 수많은 작품을 했음에도 <아비정전> 하나만이 그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겨줬다는 건 장국영이 아비를 어떻게 여겼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리라.


상처받은 수리진이 가엾지만 그녀에게 상처를 준 아비를 도저히 미워할 수 없어서 더 아픈 이야기. 그래도 그녀는 아픔과 함께 ‘영원 같은 1분’도 느껴봤으니까. 그게 그녀를 향한 그의 선물이라고 말한다면 내가 너무 야박한가.


왕가위 특별전으로 <아비정전>도 재개봉 상영 중이니 그저 감사, 또 감사!



□ 해피투게더(왕가위, 1997)


내용을 한 마디로 스포하자면 제목이 반어적이다. 하긴 어떤 사랑이 안 그럴까. 해피하려고 투게더 하지만 실제 투게더 해보면 언해피한 게 일상다반사다. 여기서도 보영은 ‘발 없는 새’다.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법인데, 그 아픔이 ‘고독’과 같다면 이것은 피할 수 없다. 해피라는 무지개에 집착하며 언해피를 끌어안는 거다. 다치려고 사랑하는 거다.


장이 건네 준 녹음기에 대고 무언가를 녹음할 때 지었던 아휘의 표정. 웃었다가 울었다가... 개인적으로 나는 그 장면이 이 영화의 모든 것이라고 느꼈다.
“그(보영)가 자유로운 이유를 알았다. 돌아올 곳이 있으니까.”
보영은 자신에게 발이 없어서 힘들었겠지만 아휘는 날 수가 없어서 또한 아팠다. 두 발로 두 사람분의 중력과 마찰력을 견뎌내야 했으면서도 보영이 두 손을 다쳐 아기처럼 보살펴줘야 했을 때를 가장 행복하게 여겼던 아휘다. 복을 받은 자는 그런 사랑을 ‘받은’ 보영일까, ‘준’ 아휘일까.


감독은 아휘의 편을 들어줬다. 주었기에 다시 받을 수 있게 만듦으로써. 그래서일까, 보영에게 더 큰 연민이 생기는 것은. 영화에서 보이지 않기에 보영이 외롭지 않기를 더욱 바라게 된다. 이것이 감독이 숨긴 더 큰 의도였다면 역시 왕가위!


왕가위 특별전으로 이 영화 또한 절찬 상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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