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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연 Mar 31. 2021

서로가 서로에게 장국영이 되어주길

by <찬실이는 복도 많지> - 시와 함께하는 찬실의 이야기

영화 프로듀서인 찬실은 오랫동안 함께 일하던 감독이 허망하게 세상을 뜬 이후 일도 잃고 꿈도 잃었다. 산동네 단칸방으로 이사한 뒤 배우인 친한 동생 소피네 가사도우미로 근근이 생활하던 어느 날, 소피의 불어선생인 단편영화 감독 영에게 반한다. 나이 40에 뒤늦게 연애세포가 깨어난 찬실. 그러나 사랑도 인생처럼 뜻대로 되지는 않고, 옆방에 사는 장국영만이 그녀를 진심으로 위로하는데... 그녀의 인생은 다시 괜찮아질까.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때가 있다. 끝간 데 모르고 추락만 하는 시절이 분명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는 것이다. 찬실이에게는 나이 40, 새로 시작하는 영화의 고사까지 잘 지낸 뒤 뒷풀이 자리에서 감독이 갑자기 가슴을 쥐어 잡고 비명횡사하면서부터 ‘그 때’가 시작된다. 인생을 송두리째 쓰레기통에 처박고 싶은, 혹은 인생이 쓰레기통이 되는 딱 그 때.

<쓰레기통처럼>
- 정호승

쓰레기통처럼 쭈그리고 앉아 울어본 적이 있다
종로 뒷골목의 쓰레기통처럼 쭈그리고 앉아
하루종일 겨울비에 젖어본 적이 있다
겨울비에 젖어 그대로 쓰레기통이 되고 만 적이 있다
더러 별도 뜨지 않는 밤이면
사람들은 침을 뱉거나 때로 발길로 나를 차고 지나갔다
어떤 여자는 내 곁에 쪼그리고 앉아 몰래 오줌을 누고 지나갔다
그래도 길 잃은 개들이 다가와 코를 박고 자는 밤은 좋았다
세상의 모든 뿌리를 적시는 눈물이 되고 싶은 나에게
개들이 흘리는 눈물은 큰 위안이 되었다
더러 바람 몹시 부는 밤이면
또다른 고향의 쓰레기통들이 자꾸 내 곁으로 굴러왔다
배고픈 쓰레기통들이 늘어나면 날수록
나는 쓰레기통끼리 서로 체온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쓰레기통끼리 외로움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영화가 좋아서 죽도록 일만 한 게 억울한 적도 없이, 연애도 못 해보고 아도 못 낳아본 걸 후회한 적도 없이, 잘 나가는 감독이 아니래도 지감독 한 사람만 바라보고 달려온 세월을 아까워한 적도 없이 살았던 찬실. 쫄딱 망해 배우하는 후배 소피의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신세를 한탄할 사이도 없이 누군가가 눈에 들어왔으니, 소피의 불어선생인 단편 영화 감독 영이 바로 그다. 그래, 인생 아무리 수직으로 내리꽂힌대도 죽으란 법은 없는 거지?

<山에 가면>
- 조 운

산에 가면
나는 좋더라
바다에 가면
나는 좋더라
님하고 가면
더 좋을네라만!



조심스럽게 영에게 다가가 사랑의 마음을 키우는 찬실. 나이가 5살이나 어린 게 무에 그리 중요한가.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인간의 나이차이 같은 건 생각할 필요가 없지. 본인이 세상 존경하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를 몰라보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과 홍콩영화를 좋아한다는 영의 취향 따위도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저는 피디님을 좋은 누나라고 생각해요.”라는 말에 찬실은 끝내 지옥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고야 만다. 찬실은 울고 싶다. 한데 가슴이 돌이 되면 눈물도 말라서 누군가 일부러 뺨을 때려줘야 하는 법. 한글을 배우는 주인집 할머니가 쓴 시의 맞춤법을 봐주다 드디어 눈물샘이 터졌다.
“사라도 꼬처러 다시 도라오며능 어마나 조케씀미까(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화상>
- 신현림

울음 끝에서 슬픔은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

울음은 사람이 만드는 아주 작은 창문인 것

창문 밖에서
한 여자가 삶의 극락을 꿈꾸며
잊을 수 없는 저녁 바다를 닦는다



영과 함께 산책을 하던 길에 찬실은 할머니들 몇 분이 공원에서 웃으며 사진 찍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지금의 고통이 언젠가 웃기 위해 거쳐야 하는 길이라고 믿는 것처럼.
“이상하게 할머니들한테는 가슴이 너무 아파서 안 까먹고는 못사는 그런 세월이 있는 것 같아요. 안 그러고서는 어떻게 저렇게 웃을 수 있나, 싶어요. 우리 할머니는 돌아가셨어요. 글이라고는 이름 세 글자밖에 모르는 완전 시골 촌 할매였는데도 사는 게 뭔지 다 아는 것 같았어요.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갈대>
- 신경림

언제부터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천만다행인 것은 옆방남자가 찬실 옆에 있었다는 것이다. 장국영과 닮은 그 남자. 무엇 때문인지 그 남자는 찬실의 마음을 속속들이 다 알아주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화이팅을 외쳐줬다.
“찬실씨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해 봐요.”
장국영의 조언대로 찬실은 오랜 생각 끝에 이런 답을 들려준다.
“장국영씨. 지금보다 훨씬 더 젊었을 때 저는 늘 목말랐던 것 같아요. 사랑은 몰라서 못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만은 나를 꽈악 채워줄 거라고 믿었어요. 근데 잘못 생각했어요. 채워도 채워도 그런 걸로는 갈증이 가시지가 않더라고요. 목이 말라서 꾸는 꿈은 행복이 아니에요. 저요, 사는 게 뭔지 진짜 궁금해졌어요. 그 안에 영화도 있어요.”
그 안에 영화도 있다, 는 말을 들은 후에야 장국영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찬실보다 더 행복하게.

<無의 페달을 밟으며>
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 1
- 유 하

두 개의 은륜이 굴러간다
엔진도 기름도 없이 오직
두 다리 힘만으로
은륜의 중심은 텅 비어 있다
그 텅 빔이 바퀴살과 페달을 존재하게 하고
비로소 쓸모 있게 한다
텅 빔의 에너지가 자전거를 나아가게 한다
나는 언제나 은륜의 텅 빈 중심을 닮고 싶었다
은빛 바퀴살들이 텅 빈 중심에 모여
자전거를 굴리듯
내 상상력도 그 텅 빈 중심에 바쳐지길
그리하여 세속의 온갖 속도 바깥에서
찬란한 시의 月輪을 굴리기를, 꿈꾸어왔다
놀라워라, 바퀴 안의 無가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희망의 페달을 밟게 한다
바퀴의 내부를 이루는 무가
은륜처럼 둥근, 생의 노래를 부르게 한다
구르는 은륜 안의 무로
현현한 하늘이, 거센 바람이 지나간다
대붕의 날개가 놀다 간다
은륜의 비어 있음을, 무를 쓸모 없다 비웃지 마라
그 텅 빈 중심이 매연도 굉음도 쓰레기도 없이
시인의 상상력을 굴린다
비루한 일상을 날아올라 심오한 정신의 숲과 대지를 굴리고
마침내 우주를 굴린다
길이여, 나를 태운 은륜은 게으르되 게으르지 않다
무의 페달을 밟으며
내 영혼은 녹슬 겨를도 없이 自轉하리라



가슴이 텅 비어있음을 자각하고 그 빈 가슴이라도 부여잡아야 했던 때가 나라고 왜 없었겠나. 이 영화를 보면서 작년에 펑펑 울며 봤던 <오 루시!>가 떠올랐다. 느낌이 비슷하다. 중년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여성감독만이 그려낼 수 있는 섬세한 감정들로 꼭꼭 채운 두 영화는 참으로 많이 닮았다. 이 영화를 한국판 <오 루시!>라 불러도, 혹은 <오 루시!>를 일본판 <찬실이는 복도 많지>로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두 영화에 대한 격한 공감은 나 역시 그런 세월을 겪었던(겪고 있는) 같은 나이대의 여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감정의 확장도 가능하다. 안성기씨가 연기한 <화장>을 봤을 때 중년 남성의 처절한 외로움도 분명 다가왔고 함께 아팠으니까. 그러니 남성분들도 꼭 보시라, 이 말씀.

노컨택(No Contact) 시대에 우리가 성찰해야 할 ‘관계’의 핵심은 두 가지다. ‘진짜의 나’와 만나는 것. 그리고 타인의 외로움을 모른 체 하지 않는 것. 전자는 뿌리를 내리기 위함이고 후자는 가지를 내기 위함이다. 이 어렵고 고단한 시기를 한 그루의 나무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 마침내 고통의 시간이 끝나는 날, 울창해진 숲을 볼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그 시작은 당연히 이 영화를 보는 것이다. 위아래로 뿌리와 가지를 동시에 뻗게 할 힘을 듬뿍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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