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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연 Mar 28. 2021

길이 있어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으로써 길이 생긴다

by <옥토버 스카이>

스푸트니크 1호가 발사된 1957년, 콜우드라는 작은 탄광마을에 사는 호머는 인공위성이라는 날아가는 별을 보고 로켓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꾼다. 호머의 꿈을 그저 망상이라 여겼던 아버지 존은 마을 남자들의 정해진 숙명에 따라 호머에게도 광부가 될 것을 종용했지만 담임선생님 라일라만큼은 호머를 믿고 적극 지원해준다. 꿈을 포기해야 할 여러 번의 위기 상황과 숱한 실패를 딛고 호머의 로켓은 드디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데... 과연 그가 이룬 성공은 로켓을 날게 한 일일까, 스스로를 지켜낸 일일까.




<어떤 이의 꿈>
- 봄여름가을겨울

어떤 이는 꿈을 간직하고 살고 / 어떤 이는 꿈을 나눠주고 살며 / 다른 이는 꿈을 이루려고 사네

어떤 이는 꿈을 잊은 채로 살고 / 어떤 이는 남의 꿈을 뺏고 살며 / 다른 이는 꿈은 없는 거라 하네

세상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과/ 세상에 이처럼 많은 개성들 / 저마다 자기가 옳다 말을 하고/ 꿈이란 이런 거라 말하지만

나는 누굴까? 내일을 꿈꾸는가? / 나는 누굴까? 아무 꿈 없질 않나? / 나는 누굴까? 내일을 꿈꾸는가? / 나는 누굴까? 혹 아무꿈


꿈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나는 참 많이 방황했다. 한 번도 꿈을 잃은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한 번도 내일을 꿈꾸지 않은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나는 꿈을 잊도록 강요당했고 뺏기기도 했었기에 내 꿈을 숨기며 살아왔다. 꿈을 꾸고 있다는 것 자체를 들키지 말아야 했다. 오랫동안, 혹은 지금도. 그래서 ‘꿈’이라는 단어는 내게 매우 아프면서도 그만큼 간절한 단어이다.

꿈을 둘러싸고 사람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꿈을 꾸는 사람, 그 꿈을 키워주는 사람, 그 꿈을 짓밟는 사람. 대체로 부모(또는 가족)나 선생님은 꿈을 키워주는 사람일 것이라고 오해하기 쉬운데 의외로 그들이 오히려 꿈을 짓밟는 사람인 경우도 허다하다. 꿈을 갖고 이루기 위해서는 본인의 의지만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것이 가능한 환경적 조건과 심리적 응원 또한 절대적이다. 가난 때문에, 부모의 욕심 때문에, 대대로 이어진 가업을 잇거나 재산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학업성적만이 우수성으로 인정되는 편협한 인식으로 꿈도 아무나 꿀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는데 왜 일까지 하려고 해요? 욕심이라고 생각 안 해봤어요?”
“네가 ‘욕심’만 버리면 주변 사람들이 다 편해질 텐데......”
“내가 눈 감기 전에 내 아들 밟고 올라가는 며느리는 못 본다!”

직장에서, 가족으로부터 들었던 말들이다. 믿기는가, 21세기에! 일과 가정을 병행하는 수많은 여성들이 있음에도 나는 저런 말들을 들었고,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게 출퇴근 하는 일을 하겠다는 생각이 ‘욕심’으로 치부됐다.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우리는 무수히 들어왔고 자문하며 남에게도 물으며 살아왔을 것이다. 학교 다닐 때는 흔히 선생님이요, 의사요, 발레리나요, 피아니스트요, 판사요, 축구선수요, 대통령이요 같은 대답들을 했다. 아주 드물게 ‘놀고먹는 사람’이 되겠다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 아이들은 어김없이 선생님의 꿀밤세례를 맞았다. 성장하면서, 심지어 성인이 된 이후에도 꿈을 특정 직업과 동일시하는 것에 대해 큰 거부감이나 잘못됐단 인식이 없었는데, 내가 꿈을 잃어가면서 그리고 내 아이들이 똑같이 ‘네 꿈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듣기 시작하면서 나의 꿈에 대한 정의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실 불혹을 넘기고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도 아직 꿈을 찾아 헤매고 있다. 꿈을 특정직업으로 규정한다 해도 살면서 그것은 수없이 변했고, 소명 같았던 한 가지 직업에 꽂혔다가도 복수의 직업으로 확장할 때도 있었다. 때때로 그것은 구체적인 어떤 목표이기도 했고, 실현불가능해 보이는 고매한 이상(理想)이기도 했다. 그러니 꿈이 대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면서 나를 비롯한 많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너무도 쉽게 ‘꿈을 꾸라’는 말을 내뱉는 것을 나는 미안하게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자신의 미래를 그려보게 하는 것은 교육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이다.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명확한 동기와 명분을 제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수학에 관심 없고 과학은 지루했던 호머가 그 어려운 공식들을 스스로 풀어낼 수 있었던 건 바로 로켓을 날리겠다는 그의 ‘일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의 학교, 아니 우리 사회는 여전히 아이들에게 꿈을 특정직업으로 규정하게 한다. 그것은 어쩌면 꿈에 대한 모욕이다.



호머가 처음부터 “나는 NASA에 가고 싶어요!”라고 말했던 게 아니다.(‘삼성에 취직하고 싶어요!’가 진정 꿈일 수 있나?) 그저 하늘을 가로지르는 인공위성이라는 별을 보고 로켓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석탄을 캐러 지하로 내려가는 아버지가 너의 미래도 똑같이 ‘지하로 내려가는 것’이라고 암시했을 때, 그것은 아버지의 인생이지 내 인생이 아니라고, 나의 꿈은 ‘우주로 날아가는 것’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다시, 꿈이란 무엇인가.
다행히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한 어른을 만나고 나서 알게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꽤 많은 성공을 이룬 높은 자리에 계신 분이어서 나는 그 분이 이렇게 말씀하실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아직 꿈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대체 그것이 무엇이기에 70넘은 당신께서, 너무 많은 걸 이뤄내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을 것 같은 당신께서 그것을 찾고 있단 말입니까, 라는 질문을 하기가 무색하게 그 분이 내리는 꿈에 대한 정의를 듣고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 심장을 팔딱팔딱 뛰게 하는 무엇. 그 가슴 벅찬 황홀감을 주는 일이 바로 꿈이 아닐까요?”



그렇다. 꿈이란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일이다. 그것만이 나를 존재하게 하는 이유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그런 일. 그래서 70넘은 그 분이 꾸는 꿈을 함부로 노욕이라 말할 수 없었다. 그것만이 그 분을 살게 하는 증거가 될 테니까.

“아버지. 저는 제가 무언가 될 수 있다고 마음으로 믿어요. 그리고 그건 제가 아버지와 다르기 때문이 아니에요. 똑같기 때문이죠. 저도 아버지처럼 고지식하고 강할 수 있어요. 제가 바라는 건 아버지처럼 좋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물론 본 부론 박사님은 위대한 과학자에요. 하지만 제 영웅은 아니에요.”

“제 영웅은, 아버지에요!”라는 말을 굳이 저렇게 길게 설명하는 호머. 그렇게 아들의 꿈을 무시하고 짓밟았던 아버지가 아들에게서 저런 말을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나는 내가 이 생에서는 결국 나를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그렇다면 나도 역시 흔한 부모들처럼 아이들에게 내 인생을 대신 살도록 강요하게 되지 않을까, 비록 나는 나를 놓지만 아이들의 꿈을 지켜주기 위해 사는 것을 보람으로 여겨야 할까를 고민했었다. 너희들의 꿈을 지켜주기 위해 나는 내 꿈을 잃는 게 두렵지 않아, 라고 말하는 건 그들에게 과연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어제 이 영화를 다시 보고 또 다시 눈물을 흘리게 된 건, 그 때의 깊은 절망의 시간 속에서 내가 단호히 ‘아니!’라고 대답했던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호머가 아버지에게 '그럼에도' 당신이 내 영웅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건 아버지가 자신의 길을 자랑스레, 너무도 고집스럽게 자신의 발자국을 하나씩 남기며 걷는 걸 봤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내 아이들에게 주고 싶은 희망 또한 나는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 꿈은 나를 살아있게 하여 그것을 놓으면 나는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내가 여전히 또렷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바로 그것이다. 바람마저 자신의 길을 아는 것처럼...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 천상병

강하게 때론 약하게
함부로 부는 바람인 줄 알아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바람은 용케 찾아간다.
바람길은 사통팔달(四通八達)이다.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가는데
바람은 바람길을 간다.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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