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승연 Mar 13. 2021

사랑은 ‘still’의 뜻을 아는 것에서부터

by <스틸 앨리스>

컬럼비아대 언어학 교수인 앨리스. 똑똑하고 예쁘고 다정한 아내이자 세 아이의 엄마인 그녀는 젊은 나이에 희귀한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다. 안타깝게도 그 병은 유전병으로 그녀 자신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고, 세 자식 중에도 일부에게 유전됐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노력과 분투로 자신의 인생을 소중히 가꾸고 지켜왔던 그녀는 자신의 의지를 무력화하는 병마의 힘에 쉬이 굴복하지 않고 절망의 순간에서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애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 가족을 진실되게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영화 <스틸 앨리스>!





<바라보는 자에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정신의 힘을 잃는 병과 육체의 꺼짐을 앓는 병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라면 나는 무엇을 놓을 수 있겠는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나는 선택하고 싶은 한 가지가 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그저 순서의 차이일 뿐 결국 하나의 소멸은 다른 하나의 소멸을 반드시 끌고 온다. 부모님의 죽음을 지켜보는 동안 나는 시작이 무엇인지에 상관없이 둘 모두 끝내 같은 곳을 향해 가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병을 앓는 이와 별개로 지켜보는 사람으로 힘들었던 건 역시 정신의 소멸쪽이었다. 내가 알던 아버지, 내가 봐왔던 엄마. 익숙했고 그래서 당연하다 여기고 사랑했던 그 모습들. 스스로는 평생 지키고 가꿔왔던 자신들의 모습을 얼마나 지키고 싶었을 것인가. 있는 힘껏 의지를 불태운대도 결국 잃을 수밖에 없는 것들을 자식인 내가 지켜주거나 도와줄 방법은 전무했다.

아니, 아니다.
병마와의 싸움으로 스스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자식인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돌이켜보니 진정 그랬다. 끝까지 당신들이 나에게 보이고 싶었던 그 모습 그대로 기억해주는 일, 그것이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그들이 변해갈 때 주변 사람들은 내게 이렇게 위로하곤 했다.
“정을 떼는 과정이라 생각하렴.”
이것은 곱씹을수록 참으로 모지고 못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차라리 ‘끝이란 참 추하구나!’가 덜 아팠을 것 같은, 잔인하고도 야박한 인심이여. 인면수심이여. 그것이 진정 남은 사람을 위해 준비된 말이던가.

좋다, 그렇다면 과연 떼어지긴 하는가. 그 정이라는 것! 징글징글해서 포기해 버리고도 싶은 그 시간 속에서도 그들에 대한 연민과 자책이 그토록 나를 괴롭힌다는 것을, 순간에 그치는 마음일지언정 제발 이 모습으로라도 내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깊은 애원이 내 가슴을 한바탕 휩쓸고 가는 걸 알고나 그런 말을 건네냔 말이다.

하여 숱한 기억과 추억들이란 꺼져가는 그들에게는 아픔을 느끼지도 못한 채 지워지는 것일지라도 살아있는 나에게는 ‘부러 애써 놓는 것’이 되더라. 그 ‘놓음’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낸다 해서 끝내 정이 떼어지는 것도 아니더라.



Still Alice...
제목이 너무나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여전히’ 너라는 것. 너는 ‘그냥’ 앨리스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굳이 넣지 않더라도 충분한 ‘still’.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것이 힘주어 노력해서 배려하는 느낌이라면,
여전히(still), 는 그 어떤 변화도 존재의 의미를 훼손할 수 없다는 무한한 존엄과 굳은 의지와 숭고한 인간애를 품고 있다. ‘정을 뗀다’는 것과는 정반대에 놓인 지극한 사랑의 가치 말이다.




<나 자신에게>


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누구라도 한 번쯤은 생각해봤을 것이지만 그 참뜻도 방법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영원한 숙제. 차라리 남을 사랑한다는 게 쉽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걸 느끼는 작은 변화들도 가끔은 마음의 온 에너지를 소진할 만큼 깊은 우울에 날 빠뜨리곤 하는데, 어느 날 예고 없이 삶의 종착역을 알리는 차임벨이 울린다면 정말로 나는 나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느냔 말이다. 그런데 과연 사랑에는 옳은 사랑이 있다. 바른 사랑이 있다. 우리의 실수 중 가장 흔하고 안타까운 것은 자신을 향해서는 너무 자주 잘못되거나 그릇된 사랑을 한다는 것.

어쩌면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용서에서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매일 무언가를 잃고 있는 현재의 자신, 앞으로 더 끔찍하게 모든 것을 다 잃고 말 미래의 자신. 그리하여 끝내 사랑하는 가족과 주변인들에게 짐이 되고 말 나를, 내가, 용서해야만 비록 스러지더라도 위대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앨리스는 그 용서라는 말을 이렇게 풀어준다.



“나는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애쓰는 중입니다. 과거에 내가 원했던 내 모습을 유지하려 애쓰는 것이에요.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살자고 나에게 말합니다.
상실의 기술을 터득하기 위해 내 자신을 닦달하지 않고 그저 이 순간을 살자고....”
“I'm not suffering, I'm struggling. Struggling to be a part of things to stay connected to who I want was.
So live in the moment, I tell myself.
Live in the moment, and not beat myself up too much for mastering the art of losing.”


작가의 이전글 '사람(人)이 일부러 하(爲)'면 거짓(僞)이 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