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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플 Oct 03. 2022

6.  DAY 1) 모든 여행은 첫날이 중요하다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커피-1

 3년 만에 간 인천공항은 낯설었다. 수화물을 맡기고 체크인하면서 직원은 이런저런 서류를 요구했다. 1. 백신 접종 증명서 2. 괌에서 숙박할 호텔 바우처. 그동안 여행하면서 호텔 바우처를 실제로 보여준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제법 일 처리가 야무지다고 생각했다.

 사실 체크인을 하면서 머릿속에 든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어디라도 앉고 싶다.’ 편하게 누워서 자지 못하고 앉아서 2시간도 되지 않는 시간을 겨우 졸았으니 당연하게도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수화물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자동 출국심사를 한 후 면세 지점으로 들어갔다. 하늘 높은지 모르고 오르는 환율 덕분에 면세 쇼핑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면세나 백화점이나 차이가 없다는 내 말에 P는 면세점이 아니라 과세점 아니냐고 말했고, 나는 그 말이 너무 웃겨 한동안 자주 써먹었다. 그러니 내 목표는 오로지 라운지였다. COVID-19로 인해 공항 이용객이 줄어 라운지 역시 운영하지 않는 곳이 많았다. 나는 앉아서 쉴 곳을 찾아 마티나 라운지로 향했다. 운 좋게도 도착하자마자 줄을 서지 않고 바로 입장할 수 있었고, 따뜻한 스크램블드에그와 샐러드를 먹으며 핸드폰 충전을 했다. 보딩 타임을 맞춰 탑승동으로 가는 셔틀 트레인을 타기 위해 라운지를 떠날 때쯤, 아까와는 상이하게도 라운지 입장을 위해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타이밍이 좋았구나, 여행 시작부터 운이 좋았구나 싶다(물론 여행 전날까지 온갖 사건·사고가 있었지만).

 비행기에 탑승해 좌석에 앉아 승무원의 안내를 받자마자 잠들었다. 불편한 이코노미 좌석을 타면서 그렇게 푹 자본 적은 손에 꼽는 일이었다. 불편하게 뜬 눈으로 비행하느니 다음에 여행할 때도 전날 밤을 새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게 바로 발상의 전환일까?








 출국 직전 B와 연락을 했다. 괌에서 숙소로 가는 방법과 한인 택시업체 등의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서였다. B는 내가 알아본 정보를 듣고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C에게 한 번 물어볼게!’ 그리고 C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가 쌤 픽업하러 갈게요. 친구분한테도 그렇게 전해주세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이런 호의를 베풀다니, 친구를 잘 둔 덕에 호강하게 된 것이다.


어렴풋이 괌이 보이기 시작했다. 착륙 직전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

 비행기가 착륙하기 직전 잠에서 깼다. 마침 승무원은 작성해야 하는 두 가지 서류를 줬는데, CDC 서약서와 비자 면제 신청서였다(ESTA 비자를 신청했으면 비자 면세 신청서는 굳이 작성할 필요가 없다). 서류 작성을 끝내고 창밖을 보니 새파란 바다와 괌의 건물들이 장난감 모형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입국 심사는 간단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사람들을 따라 걸으면 수화물을 찾는 곳이 나왔고, 게이트로 가서 직원이 묻는 말에 대답만 잘하면 되었다.

무슨 목적으로 왔어? 나 휴가라 여행하러 왔어. 괌은 처음이야? 맞아, 처음이야! 좋은 시간 보내. 고마워.

 운 좋게도 내 캐리어는 거의 첫 번째로 나왔고 다른 사람들보다 빠르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A4용지에 적힌 내 이름이 보였다. C와 첫 만남이었다.


 C는 괌에서 거주한 지 약 10년이 된 현지인이고, 여행 관련 일을 하고 있다. B가 말해준 그의 정보다. 굉장히 간략했고 나는 더 물어보지 않았다. 아마 C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제 학교 후배고요, 한의사예요. 스쿠버다이빙이 아니라 프리다이빙을 해요.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주 적은 정보만을 가지고 만났다. 오히려 좋았다. 지나치게 많은 정보는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게 하니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며 C는 웃었다. 안녕하세요. B의 학교 후배예요. 이렇게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나도 같이 웃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리고 웃음엔 웃음일지니. 우리는 공항 밖으로 나갔다. 나는 공항 앞에 서 있는 커다란 야자수를 보고 사진을 찍었고 C는 차를 가져오겠다고 잠시 기다리라 했다. 트렁크에 싣기 위해 캐리어를 번쩍 든 C는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일주일 여행하는 여자 짐이 이렇게 가벼운 건 처음인데요.’ 나는 아마 깔깔 웃었던 것 같다.

 커피 한잔할까요. 공항 2층에도 카페가 있는데 맛이 없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숙소에 가기 전 그가 추천하는 카페로 갔다. 나는 조수석에서 편안하게 괌의 도로를 만끽했다. 가로수는 한국과 다르게 야자수들이었고 이름 모를 붉은 꽃이 핀 커다란 나무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저 가로수의 꽃이 예뻐요.

 그래요? 저게 이름이 뭐였더라.

 몰라도 괜찮아요. 저도 한국 가로수들 이름 몰라요.

 우리는 적당히 편하고 적당히 어색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그는 대화할 때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었고, 나는 이제 막 여행을 와서 마음이 굉장히 너그러웠다. 우리는 꽤 상성이 좋았다.

 여기 커피가 괌에서 나름 괜찮아요. 주차하고 카페 문을 열어주며 C가 말했다. 괌에는 맛있는 커피가 많지 않아요. 그의 집에는 커피 머신이 있다고 했다. 아침에 꼭 커피 한 잔을 마신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둘 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그와 나의 첫 공통점이었다.

cafe Infusion. 나는 C에게 인퓨전은 괌의 스타벅스라고 농담했다.


 커피를 챙겨 자리에 앉아 우리는 짧게 담소를 나누고 본론에 들어갔다.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돼요? 스쿠버는 안 하고 프리다이빙을 하는 거죠? 예약한 곳은 있어요?

 나는 하나하나 성실히 대답했다.

 -오늘은 별빛투어를 예약했고, 내일이랑 내일모레는 1인 예약을 받아주는 프리다이빙 업체를 알게 되어서 거기서 트레이닝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수요일은 돌고래 크루즈와 스노클링을 하기로 했어요. 목요일부턴 B가 합류해서 아무런 일정을 짜지 않았어요.

 말을 하고 나니 좀 미안했다. 왜냐하면 내 계획은 굉장히 느슨해서 계획이랄 것이 없었고, 혼자서 4일을 저렇게 보내면 굉장히 심심할 게 뻔해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아주 적절한 일정이었다. 나는 낮에 맥주도 마셔야 했고, 책도 읽어야 했고, 중간에 심심하면 해변에서 산책도 해야 했다.

 다행히 아는 친구가 프리다이빙을 잘해요. 친구한테 일정을 물어봤는데 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목요일은 B를 공항에서 픽업한 후에 저녁 먹고 쉬고, 금요일 토요일에 다 같이 다이빙 포인트로 가서 그 친구랑 프리다이빙을 하면 좋을 거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체험 스쿠버다이빙도 한 번 하고. 어때요?

 어떻냐니, 너무 좋았다. 나는 무조건 좋다고 신경 써줘서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C는 프리다이버 친구에게 토요일 일정을 한 번 더 물어보겠다고 했다. 금요일은 가능한데 토요일은 다시 확인해야 한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 별빛투어 가기 전에 일정은 어떻게 돼요.

 아무것도 없어요. 저녁에 석양이 잘 보이는 곳을 찾아서 저녁을 먹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럼 같이 저녁 먹을까요. 제가 호텔로 데리러 갈게요.

 저랑 놀아주시면 정말 고맙죠.

 우리는 저녁에 만날 것을 기약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약한 호텔에 도착해 카운터에서 체크인했다. 직원은 카드 결제를 하며 괌은 처음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웃으며 대답했다. 괌에서 만난 모든 이가 괌은 처음이냐고 물었다. 여행객에게 하는 인사치레인지 괌을 여러 번 오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는 괌에 처음 왔으면 꼭 가야 하는 곳들이 있다고 설명하며 메모지에 적어서 건네줬다. 갈지 안 갈지는 모르나 그의 마음이 고마웠다. 그의 미소가 귀여운 건 덤이었다.

로비 직원이 추천해준 괌에서 꼭 가야하는 BEST3. 나는 저 중에 단 한군데도 가지 못했다.


 C를 다시 만나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선크림 사기. 한국에서 파는 선크림은 SPF 지수가 5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괌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은 현지에서 파는 선크림을 사라는 말. 못해도 SPF 80 이상은 써야 한다고 했다. 나는 캐리어에서 양산을 꺼내 길을 나섰다. 신고 온 운동화는 구석에 처박아 놓고 크록스로 갈아신었다(괌에 도착한 이후로 나는 단 한 번도 운동화를 신지 않았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말이다. 심지어 마지막 날 그 운동화는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괌으로 여행을 오면 한국 관광객들이 한 번은 간다는 마트가 있는데 바로 K-MART다. ‘선크림은 근처 편의점이나 마트 어디든 팔아요’라고 C가 말했으나 K-MART가 궁금했다. 걸어서 15~20분 거리였으나 나는 일정이 없는 느긋한 관광객이니 걸어서 가보기로 했다.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여행을 가면 걸어야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다. 차를 타고 쌩쌩 달리면 보이지 않는 그곳의 정취 말이다. 물론 차가 편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K-MART는 생각보다 더 넓었다. 한국인들은 이것저것 사느라 바쁘다는 그 마트에서 나는 단지 유명한 바나나보트 선크림(당연히 SPF 100이었다)과 치즈 맛 봉지 과자만 샀다. 참으로 비효율적인 동선과 구매가 아닐 수 없다. 참고로 과자는 너무 짜서 다 먹지도 못했다.

 왔던 길을 되짚어 호텔로 돌아오니 C의 차가 호텔 앞에 있었다. 짐만 놓고 올게요! 나는 뜀박질을 해 방에 과자와 선크림, 양산을 던져놓고 C에게로 갔다.

 근처에 석양이 좋은 식당으로 알아봤어요. 별빛투어까지 시간이 넉넉했으면 좋았을 텐데.

 C는 느긋하게 저녁을 먹지 못하는 것에 애석해했다. 식당에 도착해 석양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야외에서 먹으면 석양은 더 잘 볼 수 있으나, 햇볕이 뜨거워 익어버릴 거라는 게 그의 의견이었다. 나 역시 동의했다. 해가 바다에 잠기기 전의 단말마는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우리는 메뉴판을 한참을 들여다봤다. 나는 어떤 메뉴를 시켜도 괜찮은 사람이었고 그는 맛있는 걸 대접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랍스터와 스테이크를 시켰고, 음식이 나온 뒤에야 ‘사실은 갑각류를 잘 못 먹어요.’라 고백하는 그 덕분에 랍스터는 온통 내 차지가 되었다. 다음 식사에는 갑각류는 시키지 말자는 의견을 제안했고 그는 자신은 정말 괜찮으나 알겠다고 내 말을 수락했다.

 그의 말대로 석양은 정말 아름다웠다.

-모든 여행은 첫날이 중요해요. 첫날 기억이 좋아야 해.


석양이 아름다웠던 투몬비치의 Sails BBQ. 시간이 없어 바베큐는 먹지 못했지만 충분히 아름다웠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첫날의 마법 덕분인지 괌에서는 좋은 일뿐이었다. 여행하는 동안 힘든 일이 없었던 게 아니라 그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길 수 있었다는 말이다.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은 것처럼 행복은 내 마음에 있는 것이니 말이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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